LG 트윈스 팬인 후배를 만났다. 야구 팬덤 세계가 궁금해서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더니, 대뜸 이렇게 대답을 시작했다. “야구 팬덤은 연예인 팬덤과 달라요. 우리는 무조건 좋아하고 지지하지 않아요. 이것저것 요구도 많이 하고 비판도 많이 해요.”
연예인 팬덤에 대한 오해는 이렇게나 깊다. 연예인 팬덤이라는 게 ‘오구오구 내 가수 잘한다, 내 가수 하고 싶은 거 다해’이런 분위기가 절대 아닌데 말이다.
팬덤은 핵심 고객인 동시에 가장 엄중한 감시자다. 팬덤의 가장 큰 목적은 스타의 가치 향상, 이 목적을 벗어난다 싶으면 가차 없이 비판을 가하고 피드백(feedback)을 요구한다. 피드백(feedback)이란, 비판과 요구에 대한 답변 또는 이것이 원인이 된 변화를 뜻한다.
성대에 무리가 갈 정도의 스케줄, 성감수성이 의심되는 타이틀곡, 19금 웹툰 기반 드라마 출연처럼 본업과 관련된 비판은 물론, 스타일링, 홍보방법, 매니저 태도 등, 모든 활동이 피드백의 대상이다. 우익 성향 일본인 프로듀서와의 협업 발표 시 BTS 팬덤은 이를 즉각 중단할 것을 요구하며 ‘곡 철회 내용 이외의 피드백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라는 강경한 입장을 발표했다. 팬들의 눈 하나하나가 옴부즈맨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팬덤과 소속사의 관계는 애증이다. 좋게 말해서 애증이고, 애보다는 증이 훨씬 크다. 어느 팬덤도 소속사를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최고의 소속사라 할지라도 팬덤에게는 자기 스타의 앞길을 가로막는 무능력한 집단일 뿐이다. 모든 팬덤의 공통된 소원은 ‘탈 현 소속사’다.
왜 이런 애증이 생겨났을까? 스타를 바라보는 관점, 각자를 인식하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팬덤은 스스로가 스타에게 지분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팬덤의 관심과 사랑, 무조건적 희생이 없었다면 스타의 성장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팬덤에게 소속사는 나를 대신하는 대리 양육자일 뿐이다. 팬덤이 원하는 바를 대리 양육자가 똑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잘못된 길을 간다면 스톱을 외치는 것은 당연하다.
(팬덤의 눈으로 보기에) 소속사는 스타를 상품으로 생각한다.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효과를 내야 한다. 투자만큼 아웃풋이 나오지 않는다면 투자를 줄이는 게 기업의 속성이다. 그러나 팬덤은 스타를 상품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수익 창출이 아닌 가치 향상이 목적인 브랜드로 생각한다. 투자 아웃풋으로 연결 짓는 얄팍한 자본주의식 계산법을 경멸한다. 여기에서 소속사와 팬덤과의 갈등이 비롯된다.
자신의 권리를 떳떳이 주장하면서 끊임없이 피드백을 요청하는 팬덤. 그렇다면 소속사와 스타는 이 피드백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현명한 소속사, 오래가는 스타는 팬덤의 요구를 간섭이나 월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수용 가능한 수준에서 지속적으로 피드백한다. 팬덤의 요구에 따라 타이틀곡을 변경하고, 행사 일정을 조정한다. 팬덤의 요구에 따르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공식적 채널을 통해 솔직하게 그 이유를 밝힌다. 그 솔직한 이유가 납득 가능하면 팬덤도 더 이상 요구하지 않는다.
성실한 피드백은 팬들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반증이다. 누구나 나를 소중하게 여겨주는 상대를 좋아하기 마련이다. 무조건적 사랑의 상징인 팬덤도 예외는 아니다. 아니, 보이지 않는 익명의 군단이기에 그 마음과 피드백이 더욱 중요하다.
현실은, 피드백을 무시하는 소속사가 많다. 활동 방향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을 주제넘는다고 생각한다. 소속사가 내놓는 연예인이라는 상품, 여기에 만족하면 팬덤으로 머물고 불만스러우면 떠나라는 식이다. 이런 연예인은 오래가지 못한다.
팬덤은 팬덤이기 이전에 가장 가까운 소비자다. 한번 마음을 준 소비자를 지키지 못하는 기업이 오래갈 리가 없다. 아무리 팬이라도 일방적 관계는 한계가 있다. 팬심의 수명을 어떻게 연장시키느냐는 팬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브랜드의 주권은 공유되어야 한다
소비자들의 건설적이고 애정 어린 비판과 요구, 브랜드는 여기에 성심껏 피드백해야 한다. 피드백이 오갈 수 있는 채널이 많지 않았던 과거와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실시간 상호교류가 가능한 채널들이 생겨나면서 브랜드와 고객과의 관계는 달라졌다. 브랜드의 주인이 기업에서 소비자로 옮겨졌다. 이렇게 서로 간 커뮤니케이션이 수월한 시대에, 소비자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오만하거나 게으르거나, 둘 중 하나다.
일단 데뷔를 하면 더 이상 아이돌 그룹은 소속사의 상품이 아니다. 팬덤의 문화다. 브랜드도 마찬가지다. 상품이 출시되면 기업만의 것이 아니다. 그 브랜드를 사랑하고 지지하는 소비자와 주권을 나누어야 한다. 브랜드는 기업과 소비자가 공유하는 것이라는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 첫걸음이 성실한 피드백이다. 소비자의 비판과 요구에 게으르게 답하거나 무시한다면, 이 시대 브랜드의 자격이 없다. 이 시대 브랜드는 상냥한 인싸여야 한다.
모든 것의 주기가 극도로 짧아지는 현대 경영 환경. 고객의 니즈를 리드하는 것은 고사하고, 급변하는 고객의 니즈에 빠르게 부합하기도 힘든 환경이다. 이러한 이유로 애자일 프로세스 (Agile Process)가 전통적 업무방식인 워터폴 프로세스(Waterfall Process)를 대체하고 있다.
애자일 프로세스란 처음부터 완벽한 결과물을 내놓기보다 빠르게 시제품을 출시하고 고객의 피드백을 바탕으로 수정 또 수정하면서 점점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 나가는 업무 형태다. 여기에서의 핵심은 피드백이다. 애자일 프로세스가 성공하려면 고객의 피드백을 겸손하게 수용하려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물론 애자일 프로세스가 처음 시도되고 최적화된 분야는 빠른 수정이 가능한 디지털 비즈니스다. 하지만, 어떤 형태의 비즈니스건 고객이 있는 비즈니스라면 애자일 프로세스 마인드가 내재화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채널을 활성해야 한다. 이것이 이 시대 팬덤을 모으고 사랑을 받는 브랜드의 조건이다.
‘평범함을 비범함으로 만드는 것은 상상력이다’라고 이야기하는 레고. 레고는 놀이의 철학이 있는 브랜드다. 단순함을 바탕으로 무한한 상상력을 구현한다.
어느 날 레고는 한 소녀로부터 편지 한 장을 받았다. 샬롯 벤자민이라는 이름의 그 소녀는 ‘왜 레고의 여성들은 집에 앉아있거나, 쇼핑을 하나요? 왜 직업이 없나요? 남자들은 모험을 하고 생명을 구하는데 말이죠.’라고 묻고 있었다.
레고에게는 창립 시부터 내려온 ‘레고의 열 가지 원칙’이 있다. 이 원칙의 첫 번째는 ‘놀이의 무한한 확장성’이다. 그리고 두 번째가 ‘남녀 모두 즐기는 놀이’다. 남녀 모두 즐기는 놀이, 그러나 여기에 ‘동등하게’라는 조각 하나가 빠져 있다는 것을 어린 샬롯이 발견한 것이다.
이 편지를 받은 레고는 즉시 샬롯에게 여성 장난감을 만들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켰다. 그 해 여름 고생물학자·천문학자·화학자 등 여성 과학자를 중심으로 한 ‘연구 실험실 플레이 세트(Research Institute play set)’를 출시한 것이다. 이 제품은 큰 인기를 끌어 출시 일주일 만에 매진을 기록했다. 이 제품의 구체적인 아이디어는 스웨덴 자연사 박물관의 연구원인 엘린 쿠지만(Ellen Koojiman)으로부터 제안을 받아 완성되었다.
이것이 성실한 피드백의 한 예다.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의 비판을 소중히 여기고, 이 비판으로부터 잘못을 뒤돌아보며, 비판을 상쇄할 구체적인 솔루션을 만들어가는 과정 말이다.
미디어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피에르 레비(Pierre Levy)의 말을 기억하자. ‘개발된 작품에서 수용자는 빈 공간을 채워 넣는 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