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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착착 Oct 05. 2019

내향인의 완벽한 하루

가장 강구구의 생일을 맞이하여

요새 무기력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집안일도 조금 내팽개친 것 같다. 한국 가기 싫은 우울감이 나를 지배한다. 우울하고 무기력할 때는 조금 멍청해진다. 그러다 보니 기억력까지 흐리멍덩해졌나 보다. 얼마 전 강구구 출근길에 내가 운전을 해주다가 자동차의 삐걱대는 소리가 심해진 것 같아 자동차 정비하러 갈 날짜를 의논하고 있는데, 강구구가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나 그날 생일인데."

"아! 뭐하고 싶어? 어디 갈까?"

"자동차 정비하러 간다며."

"아냐! 놀러 가자. 케이크 사다 자르고 저녁 먹을까?"


아, 나도 당연히 알고 있었는데 잠시 깜빡했나 보다. 자동차 정비를 당연히 취소했다. 둘 다 섬세하거나 사려 깊은 편이 아니라서 우리는 좀 엎드려 절 받기 식의 연애를 한다. 원하는 것을 대놓고 요청하는 식이다. 강구구는 원래 성격이 그렇고, 나는 강구구에게 이 점을 많이 배웠다. 상대방이 알아주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원하는 걸 직접 솔직히 말하면, 혼자 꽁하고 있는 것보다 상처 받을 일도 없고 원하는 것도 무사히 얻을 수 있다. 일석이조라고 할 수 있지! 강구구 또한 서운해지기 전에 이렇게 미리 말해주기 때문에 나도 미안할 일을 방지할 수 있어서 좋다. 잊어버리고 자동차 정비소를 예약했으면 얼마나 미안할 뻔했어(ㅠㅠ).


초콜릿 케이크 이미지

*이미지는 Unsplash의 Lorene Farrugia

https://unsplash.com/photos/r4GMAtjuYj0


생일 당일이 되자 강구구의 엎드려 절 받기는 또 시작되었다.

"나 미역국 끓여 놓을 거지?"

"어, 저녁 먹으러 가는 것 아니었어?"

"미역국도 당연히 먹고 저녁도 먹어야지! 끓여놔 줘!"

"헉 알았어."


와, 또 강구구가 말 안 했으면 미역국이 없어서 섭섭하게 만들 뻔했다. 생일에 미역국을 꼭 먹고 싶은 건지 몰랐다. 요즘 미역국을 많이 먹었고 나는 케이크만 있으면 되는 편이라서. 아무튼 그래서 강구구를 위해 미역국을 끓였다. 나는 베지테리안이라 고기를 먹지 않지만, 강구구 혼자 다 먹더라도 고기를 좋아하는 구구를 위해 특별히 소고기를 듬뿍 넣고 한인 마트에서 비싼 육수 티백까지 사 와서 정성껏 맛을 냈다. 그리고 그러기를 정말 잘했다. 이후에 그 강구구의 엎드려 절 받기는 신의 한 수였던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밖에 나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정말 심각하게 좋아하지 않는다. 둘 다 지극히 내향인이라 몇 달간 아무도 만나지 않고 둘이만 있으면 가장 행복하다. 완벽한 생일을 보내기 위해 했던 건, 생일 전후로 있던 약속을 모두 취소하는 일이었다. 커플 동반 약속이 있었는데 강구구의 강력한 의지로 취소되었다. (나보다 강구구가 조금 더 심각한 내향인이다.) 그뿐 아니다. 사실 우리는 외식도 좋아하지 않는다. 이번에도 역시 생일 당일에 좋아하는 고급 일식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는데, 강구구가 끝까지 예약을 하지 말자고 했다. 강구구는 늘 마지막 순간에 밖에 나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예약을 해서 억지로 외출해야 하면 그 또한 고역일 것이다. 강구구가 그렇게 약속을 마음대로 취소한다고 해서 내가 서운해지는 것도 아니다. 나 또한 대체로 그렇게 아쉽지가 않다. 약속을 취소하고 집에 있는 편을 언제나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조금 더 과감하지 못한 편이라 늘 약속을 취소하자고 제안하는 쪽은 강구구다.


그래서 조금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우리는 약속을 취소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저녁 식사를 할 레스토랑에 예약 전화를 하지 않는 방법으로 생일을 준비했다. 그리고 그러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 우리는 결국 외식하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둘 다 피곤하고 쉬고 싶고 바깥에 나가서 사람들 많고 시끄러운 곳에서 밥을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생일이 특별해야 한다는 인식 때문에 굳이 하고 싶지도 않은 외식을 하는 것이야 말로 하루를 불행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퇴근하고 미용실에 들른 강구구를 차로 픽업해오는데 강구구가 갑자기 '아, 고기 들어간 미역국 먹고 싶다!'하고 외쳤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지금 고기 사 왔잖아. 너 해주려고.' 대답했다. 강구구의 눈이 동그래졌다. 웬일인가 싶었을 것이다. (나는 늘 고기를 넣지 않고 미역만 넣은 미역국을 끓인다.) 사실 이것은 강구구의 오랜 친구 D가 (물론 나의 친구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의 베프다.) 나에게 연락해서, 생일인데 고기 안 들어간 미역국을 먹으면 서러울 것 같다며 레시피까지 보내주었기 때문에 했던 일이다. '네 친구가 연락해서 고기 넣으라고 하던데?' 했더니 자기가 친구를 정말 잘 뒀다며 깔깔 웃었다.

"근데 무슨 고기 샀어?"

"그냥 소고기."

"이상한 거 산 거 아냐?"

"잘라진 거 샀어. 잘라진 거 사는 거 아니야?"

"아니 맞는데, 갈아진 거 샀을까 봐. 네가 고기에 좀 무지한 경향이 있잖아."

"갈아지지는 않았어. 그라스 페드(Grass fed)야." *Grass fed는 풀을 먹고 자란 소다.

"그건 상관없어. 그럼 이 나라에 콘 페드가 있냐?"


우리는 고기를 보는 관점이 정말 다르다. 강구구는 정말 고기고기 파다. 함께 채식을 하겠다고 실언한 적이 있는데, 그때도 내가 걱정되어 뜯어말렸을 정도다. '네가 채식을 한다고? 안돼 너 고기밖에 안 먹잖아. 그러다 죽어. 그만둬.' 했었다. 강구구의 걱정과는 달리 나는 올바르게 소고기를 잘 샀다! 이 또한 D가 씹는 맛이 있게 적당히 자르라고 해서 그런 고기로 골랐음! 생일을 맞이하여 고기를 듬뿍 넣은 미역국을 먹은 강구구는 역시나 만족스러워 보였다. 배를 통통 두드리며 웬일로 말이 많아졌다. 평소에 강구구는 입이 없다는 생각이 들 만큼 과묵한 편이기 때문에 이건 아주 기분이 좋다는 시그널이다. 사실 내가 소고기를 너무 많이 사서 강구구는 나머지 고기를 구워서 곁들여먹었고, 생선도 구웠다. 오랜만에 먹는 진수성찬이었다. 미니 사이즈이지만 이곳에서는 나름 흔한 음식이 아니고 비싼 초콜릿 케이크도 함께 잘랐다. 아까 한국 마트에 가서 사 온 귀한 케이크였다. 집에 준비되어 있던 초에 불도 붙였다. 스물몇 개까지는 없어서 강구구는 잠깐 일곱 살이 되었다. 강구구가 오랜만에 기분 좋아하자 나도 기분이 좋았다. 서비스로 재능 기부를 좀 해보려고 강구구와 보낸 오늘의 하루를 간단히 촬영한 영상과 부모님께 영상 편지를 쓰라고 해서 얻은 클립을 빠르게 편집해서 강구구 부모님께 보내드렸다. 부모님도 물론 좋아하셨다.


밥 먹고 소화시킬 겸 드라이브와 산책을 가기로 했는데 강구구가 가기 싫은지 또 뻗댔다. 분명 이건 잠깐 가기 싫은 거고 막상 갔다 오면 기분 좋아질 게 분명하다. 그래도 생일인데 집에만 있으면 기억에 안 남지 않을까? 비장의 무기로 아까 사 온 '안 예쁜 이상한 카드 중에서 심혈을 기울여 고른 그나마 귀여운 카드'에 정성껏 생일 카드를 써서 건넸다. 강구구가 기분 좋아하는 틈을 타서 다시 한번 산책 가자고 했더니 결심한 듯 '그래, 가자!' 하며 일어선다. 사실 이 드라이브에는 강구구 운전 연습을 시키려는 목적도 있다. 강구구는 뉴질랜드에서 처음 면허를 딴다. 한국에서 면허가 없어서 이곳의 단계대로 진행 중이고 지금은 연습 면허를 가지고 있어 많이 연습한 뒤 진짜 면허 시험에 붙어야 혼자 운전이 가능하다. 이번 목적지는 지금까지의 강구구 운전 인생 중 아마 가장 먼 길이었을 것이다. 중간에 몇 번 생명의 위기를 느끼고 도착한 뒤에는 우리 둘 다 기진맥진했다.


우리가 산책한 곳은 오클랜드의 푸르고 푸른 자연과 바다를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롱베이 리저널 파크였다. 공원에 도착하고는 내가 운전을 했다. 창문을 열고 천천히 운전하며 바람을 맞았다. 이제 막 봄이 오기 시작한 날씨가 선선하고 청명해서 더욱 즐거워졌다. 살면서 언제 이렇게 많은 초록색을 볼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사방에 가득한 초록색이 매일 모니터 앞에 앉아있던 눈을 정화해주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주변에는 캠핑을 온 것 같은 사람들도 있었고, 뛰어다니는 개들도 많이 보였다. 우리는 조금 뒤 차에서 내리고 싶은 마음이 들어 내려서 잠깐 걸었다.  역시 우리의 체력은 한계가 명확한 지라 모처럼 내렸는데도 한 이십 분쯤 걷자 집으로 가고 싶어 져서 곧장 집으로 출발했다. 그러고 보면 이런 점이 참 잘 맞기도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는 길에 맥도널드에 들러 아이스크림도 먹었다! 강구구는 요새 바빠서 짬을 내기가 정말 어려웠다. 생일 날도 일하고 수업을 들은 건 물론이다. 뉴질랜드 특성상 일정을 마치고도 두시가 채 되지 않아 나들이 정도는 갈 수 있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렇게 내가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하루라도 소박하고 행복한 날을 보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우리가 원했던 여유로운 삶을 찾아 이 나라에 온 만큼 앞으로는 이런 날이 더 많아지길 바랄 뿐이다. 그런 날이 올 거라 믿는다.

롱베이 리저널 파크 산책로에서 직접 촬영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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