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향한 19시간의 비행, 종착지는 환희의 그림자
꿈에 ‘안’ 그리던 대학 입학
강한 임팩트를 남긴 1편의 마무리와 다르게 내가 목표로 하던 무대는 미국이 아닌 네덜란드였다.
어릴 때부터 유럽의 정취를 정말 좋아했다. 오랜 역사와 자연과 동화되는 어마어마한 예술의 세계. 화려하고 실험적인 미국의 재즈와는 달리 유러피안 재즈는 클래식 음악을 기반으로 기본적인 악기 테크닉과 선율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미국과는 정서가 사뭇 달랐다. 그리고 20살, 서울에서 만나 나를 지도하셨던 피아노, 앙상블 선생님들 중 몇 분은 네덜란드에서 유학을 하셨는데 그 선생님들의 연주에서는 어째서인지 선율에서 이미지가 그려진다고 해야 할까, 에메랄드 빛 호수를 낀 푸른 언덕에서 황홀한 바람을 맞는 나뭇잎들과 그 너머로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선명한 아름다움. 내가 지향하는 내 음악의 방향은 아메리칸이 아닌 유러피안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인생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나는 고3 때 내로라하는 국내 실용음악 대학교에 지원하여 불합격, 그리고 20살 때 서울에 상경하여 음악공부를 전문적으로 시작하면서 꿈에 그리던 네덜란드 학교에 지원했지만 불합격의 결과를 받았다. 하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자신을 믿었다. 나는 재능이 있고 충분히 성장 가능성이 있다 다만, 아직 진학하기엔 실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여러 차례의 고베를 마시긴 했지만 네덜란드에 있는 학교 오디션 재수를 하기로 결정하고, 미국과 네덜란드는 오디션 시기가 다르니 경험 삼아 버클리 음대 오디션을 봐볼까? 하고 시도한 것이 비행기 티켓의 종착지를 바꾸어 놓은 것이다. 하루빨리 대학에 들어가길 원하는 부모님의 기대에 응하여 네덜란드 재수는 하지 못한 채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짭짤한 바다 냄새가 나는 촌구석에 위치한 버클리 실용음악학원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나의 버클리 오디션 곡은 Kenny Barron의 Spiral이었다.
오디션을 위해 Odd meter 7/8박자로 직접 편곡하고 피아노 트리오 구성에 템포 200에 연주했다.
곡을 틀어놓고 글을 읽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링크 첨부합니다.
원곡 https://youtu.be/esjQ7pIWYC4
나중에 딸 낳으면 너 같은 딸 낳고 싶어
서울에서 같이 음악 공부를 하며 만난 언니에게 들었던 말이다. 7살 정도 차이가 나는 언니는 예쁘장한 얼굴에 차분하고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어린 게 꼼꼼해서 자기 할 일 알아서 척척 잘 해낸다고 언니는 나중에 나 같은 딸을 낳고 싶다고 했다. (실제로 언니는 현재 딸을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서울에 올라와서는 악바리로 살았다. 음악 공부야 하고 싶은 것이니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웠다. 어렸으니 체력도 대단했다. 카페 알바도 하고 쌀국수 음식점 주방보조도 하고 하루 연습 7시간 이상 채우고 수업 듣고 과제하고 레슨 받고 합주하고 공연하러 다니고 영어 공부하고....... 지금은 다시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다. 20대 초, 꿈에 대한 열정이 한창 강한 시기에 투정을 할 것도 없을 만큼 재밌는 삶을 살았다. 그때는 노력하면 다 됐으니까.
학교로부터 17년 5월에 입학하라는 합격 레터를 받고는 곧바로 입학 예치금 $1,000을 송금했다.
I-20 Request, VISA 인터뷰, 집 렌트 등 복잡한 입학 준비도 혼자 척척 잘 해냈다.
그렇게 나는 F-1 학생 비자가 빳빳하게 붙은 여권을 품은 채 활개를 펼칠 날을 카운트 다운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고 내 미래는 환희로 가득 찼다.
환상의 나라, 부르짖는 아메리칸드림
17년 5월 중순, 나는 인천-도쿄-보스턴 장장 19시간이 소요되는 비행을 했다. 제주도 여행을 가며 타본 비행기 이후 두 번째로 타보는 비행기였다. 나는 큰 캐리어 두 개를 수화물로 부치고 등짝엔 선물 받은 베이지색 가죽백팩을, 한 손에는 미니 키보드를, 다른 한 손에는 기내용 캐리어를 그리고 스트라이프 무늬의 목베개를 한쪽 팔에 간신히 끼고 있었다. 내가 짐을 들고 있는 게 아니라 짐이 나를 붙들고 있는 모양새였다. 오빠와 엄마가 공항에서 배웅을 했다. 아빠는 당시 승진 면접이 있어서 오지 못했는데 후에 얘기를 들어보니 해외로 떠나서 잔뜩 흥이 난 나와는 달리 아빠와 외할머니가 집에서 서럽게 울고 있었다고 한다. 쪼그만 게 코 큰 사람들 있는 저 먼 나라로 떠난다고.
경유지 도쿄 공항에서 달러로 라테 한잔을 사 마셨다. 코-히라고 하는 일본 점원의 말투가 뚜렷하게 기억난다. 카트에 온갖 짐을 싣고 공항 구경을 나서던 나는 2시간의 기다림 끝에 보스턴 로건 국제공항으로 가는 항공편에 탑승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은 금세 사라지고 이륙하자마자 이내 긴장이 풀렸는지 나는 기절했다. 12시간의 비행 동안 앉은 상태로 수면제라도 먹은 듯 잠이 쏠렸다. 기내식이 나올 때면 눈도 다 못 뜬 채 필요 없다며 승무원에게 손사래를 쳤던 기억만 희미하게 남아있다.
그렇게 도착한 미국의 첫인상은 오감으로 다가왔다. 규모가 다른 땅덩이의 하늘은 왜인지 더 높아 보였다.
공항에서 나는 낯선 공기에 설렘과 희망과 자본주의의 냄새가 얼룩덜룩 섞여있었고 뒤바뀐 시차에 의외로 차분해진 상태로 캐리어와 갖가지 짐들을 카트에 싣고 나왔다. 그 상태로 처음 내가 보았던 것은 다름 아닌 미국의 던킨도넛. '우와 종업인이 외국인이네... 신기하다...' 하며 한참을 멍하니 서있었다.
때마침 미리 연락해둔 학교 선배 언니가 마중을 나왔다. 몇 년 만에 본 언니와 반갑게 인사를 하고 언니는 익숙한 듯 나를 데리고 공항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Backbay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흑백 프레임을 쓴 고속도로를 한참 내달리다 보니 생각하던 진짜 미국의 모습이 나타났다. 어떤 빌딩은 매우 높고 그 사이사이로 있는 낮고 오래된 건물들이 늘어져있다. 진짜 내가 미국에 왔구나.
나의 첫 집은 100년이 지난 건물들이 주르륵 서있는 Clearway street의 건물이었다.
튼튼한 벽돌로 지어진 외관에 온 몸을 짓눌러 밀어야 열리는 두꺼운 원목의 문. 엘리베이터는 당연히 없었고
내가 살 곳은 꼭대기 4층의 집. 이미 살고 있는 룸메는 두 명. 비교적 저렴한 월세에 계약한 방이었는데
저렴한 이유가 있었다. 내 방은 방이 아니라 커튼 한 쪼가리로 가려진 리빙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노후된 건물이라 그런지 바닥이 기울어져 수평이 맞지 않았다. 서있으면 어지러워서 적응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아무렴 어때 학비도 물가도 비싼 미국에서 이 정도야 호화롭다고 안심했지만
나는 집에 종종 깜짝 방문을 하는 쥐들에게 설거지를 하다 발을 밟히기도 하고 또 어떤 날에는 부서진 화장실 손잡이 때문에 30분가량 갇혀있었던 적도 있다. 그것마저도 즐거웠던 초여름의 새 학기, 앞으로 드리워져 올 그림자 같은 건 생각지도 못한 채 첫 학기 첫 피아노 레슨을 받기 위해 할아버지 교수님이 계신 방에 똑똑 노크를 하고 들어갔다.
"Show yoursel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