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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Optimist Dec 30. 2022

영화감상 핑계로 해 보는 내 얘기

영화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관람 후기

※영화에 대한 약한 스포일러가 있고, 영향을 받고 싶지 않아서 나무위키조차 참고하지 않았기에 틀린 부분이 있더라도 너른 마음으로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영화 얘기 하기 전에 내 얘기


“왜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고 차라리 무(無)가 아닌가?” 


대학시절 철학 수업에서 잠깐 스쳐가며 들었지만,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무겁고 중요한 질문이다. 나는 이 질문을 떠올릴 때면, '나는 왜 존재할까? 차라리 무가 아니라.'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본디 이 질문은 존재 일반에 대한 것이었을 터이나, 같은 질문을 나는 나의 존재에 대한 것으로 받아들여 온 셈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결론은 그 답은 찾을 수 없다, 이다. 그 답을 찾으려고 대학 전공까지 정했건만, 학교에서는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위대한 석학들마저 이 질문에 대한 명석 판명한 답을 얻어내지 못했다는 걸 배울 수 있을 뿐이었다. 


너무나 허무하지만, 반대로 족쇄에서 풀려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이제는 찾을 수 없는 답을 쫓을 필요가 없게 됐기 때문이다. 


이런 깨달음을 얻은 뒤로부터 나는 질문을 "왜?"에서 "어떻게?"로 바꾸게 됐다.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라는 "정답"을 쫓는 대신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삶이 될 수 있을까? 라는 "방법"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 어떤 영화보다도 철학적인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철학적인 제문제를 꽤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마치 위에서 소개한 내 20년 남짓한 철학적 고민을 140분에 압축해서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많은 경우 철학이란 넓은 의미에서는 '철학함', 즉 인간의 생각하는 행동에 관한 학문이라고들 말하나, 삶의 의미를 찾고자 철학을 공부했던 내게 있어서는 인간의 삶의 의미와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사실, '철학자들은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조차도 일치된 견해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라는 문장을 책에서 읽은 적이 있긴 하지만.)


삶의 의미를 좇다 보면, 마치 모든 게 의미가 없는 것 같이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 온다. 어떤 고민을 하건 간에, 어차피 삶의 끝은 죽음인데 삶에 무슨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는가.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나면, 우리에게는 한 문장이 남는다.


"Nothing matters"


조이(딸)는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셀 수 없이 많은 다중우주를 경험하고, 결국은 전지전능하지만 자기파괴적인 존재가 된다. 처음에는 절대적 진리라 믿었던 가치들을 대체하는 무언가를 찾기 위한 시도로 시작되었지만, 결국 합리주의의 안티테제로서 자리잡게 된 허무주의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극의 초반 전통적 규율과 합리성을 강조하는 에블린(주인공)과의 갈등관계가 주로 그려지는 걸 생각하면 재미있는 대조가 아닌가 싶다.


그렇기에 조이가 만들어낸 새까만 베이글은 여러가지 개념을 은유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으나, 내게는 죽음 내지 허무를 의미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윤회의 고리를 끊고 해탈의 경지로 나아가라는 불교적 가르침이나, 이상의 <날개>도 연상케 했다.



이 영화가 "진리"를 다루는 방법


"Nothing Matters"라는 말은 삶의 의미 뿐 아니라 세상의 진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맨 처음 돌이 되는 장면에서 무한한 가능성과 시간선 속에서 우리의 존재가 얼마나 보잘것 없는 지를 논하는 장면에서 나는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을 떠올렸다.


여기 있다. 여기가 우리의 고향이다. 이곳이 우리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 당신이 들어 봤을 모든 사람들, 예전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서 삶을 누렸다. 우리의 모든 즐거움과 고통들, 확신에 찬 수많은 종교, 이데올로기들, 경제 독트린들, 모든 사냥꾼과 약탈자, 모든 영웅과 비겁자, 문명의 창조자와 파괴자, 왕과 농부, 사랑에 빠진 젊은 연인들,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들, 희망에 찬 아이들, 발명가와 탐험가, 모든 도덕 교사들, 모든 타락한 정치인들, 모든 슈퍼스타, 모든 최고 지도자들, 인간역사 속의 모든 성인과 죄인들이 여기 태양 빛 속에 부유하는 먼지의 티끌 위에서 살았던 것이다.

지구는 우주라는 광활한 곳에 있는 너무나 작은 무대이다. 승리와 영광이란 이름 아래, 이 작은 점의 극히 일부를 차지하려고 했던 역사 속의 수많은 정복자들이 보여준 피의 역사를 생각해 보라. 이 작은 점의 한 모서리에 살던 사람들이, 거의 구분할 수 없는 다른 모서리에 살던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잔혹함을 생각해 보라. 서로를 얼마나 자주 오해했는지, 서로를 죽이려고 얼마나 애를 써왔는지, 그 증오는 얼마나 깊었는지 모두 생각해 보라. 이 작은 점을 본다면 우리가 우주의 선택된 곳에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광활한 우주 속의 나 자신을 떠올리면 너무나도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이토록 무한한 가능성과 시간선 위에서 진리를 운운하는 것은 오만이 아닐까? 나는 바로 이 장면이 이 영화가 "진리"를 바라보는 관점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었다. 


잠깐 지나가는 장면이었지만, 자기만 잘 난 걸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이 시대에 너무 시의성이 있어 참 인상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허무주의에 빠진 조이가 이토록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한탄을 하는 것도 참 재미있었고.



허무함의 극복으로 나아감으로서 용의 눈에 점 찍기


사실 이렇게 강력해 보이는 허무주의를 어떻게 극복하며 극이 마무리될 지 상상이 잘 가지 않았기에, 영화가 후반부에 접어들기 전까지 계속 조마조마했었다(진리성에 대한 부정도 허무주의의 일면이기에). 이 영화를 정말 좋은 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 건, 결국 허무함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 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을 내놓았고 그것이 나름대로 설득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극의 후반, 베이글 안으로 모든 것들, 심지어 본인 마저도 빨아들이려 하는 조이에게 맞서는 에블린을 설명하기에 "희망"이라는 단어조차 충분하진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허무주의에 빠져버린 딸 마저도 감싸안는 에블린의 사랑. 딸, 그리고 가족에 대한 사랑을 통해 삶의 허무함을 극복하자는 메시지는 어떻게 보면 전형적일 수 있겠지만, 가장 정도에 가까운 방향이라는 생각을 한다. 


만약 여기서 끝났다면, 이 영화는 '좋은(good)' 영화였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재밌게 느껴졌던 것은 이 영화가 내겐 삶의 의미가 가족애 하나는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는 것이다. 바로 그 점이 이 영화를 '아주 좋은(great)' 영화로 만드는 게 아닐까 싶다.


예컨대 비록 영화에서는 깊이 있게 다루지는 않지만, 매일매일 세탁하고 세금내는 삶을 성실하게 반복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어차피 살아야 하는 삶이라면, 그 삶을 어떻게 의미있게 살아내는 게 맞을까? 정답이 있는 문제는 아니겠으나, 하루하루 주어지는 일상을 충실하게 보내는 게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가 아닐까?


그리고 내가 가장 공감했던 방법은, 웨이먼드의 입을 빌려 나타났다.


"Be kind!"


누군가에겐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가 아닌가 싶을 수 있는데, 나는 무척 공감이 됐다. 다시 <창백한 푸른 점>에서 문장을 빌려 와 보면,


우리가 사는 이곳은 암흑 속 외로운 얼룩일 뿐이다. 이 광활한 어둠 속의 다른 어딘 가에 우리를 구해줄 무언가가 과연 있을까. 사진을 보고도 그런 생각이 들까? 우리의 작은 세계를 찍은 이 사진보다, 우리의 오만함을 쉽게 보여주는 것이 존재할까? 이 창백한 푸른 점보다, 우리가 아는 유일한 고향을 소중하게 다루고, 서로를 따뜻하게 대해야 한다는 책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있을까?


삶의 의미엔 정답이 없다. 우리가 쫓을 진리도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주어진 삶을 의미있게 살아내는 것 뿐인데,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삶을 의미있게 살 수 있을까? 칼 세이건 개인의 견해이겠지만 삶에 대해 겸손하고, 우리의 고향을 소중히 다루고, 서로를 따뜻하게 대하는 것만큼 우리의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다른 방법이 또 있을까?


나는 바로 그 맥락에서 영화가 타인에게 친절하기를 주문하고, 그를 통해 세상을 구하는 모습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삶의 의미를 더 이상 쫓지 못하게 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천착하게 되었다. 주어진 삶의 의미를 찾을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가 삶을 의미있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때 쯤 부터 개인적으로 세운 목표가 '좋은 사람 되기'였다. 그랬기에 더욱 공감이 갔다.


내가 친절하려고 노력하니 주변 사람들이 행복해지고(또는 행복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주변에 모이기도 하고), 그들로 인해 나도 행복해지는 선순환이 생긴다. 안 될 일이 잘 되기도 하고, 어려울 땐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되기도 한다. 


물론 언제나 내 주변 사람들이 내게 친절하게 구는 것도 아니고 언제나 일이 잘 풀리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하지 않는 것 보다는 훨씬 내 삶의 질이 높아지고 가치있게 느껴진다. 그런 점에서, 친절하게 살아 보는 건 내 인생을 가장 크게 바꾼 선택 중 하나가 아니었나 싶다.



언젠가 한 번은 최근의 내가 삶을 대하는 태도를 정리해 보고 싶었는데, 영화를 보며 마치 내 일생의 고민들을 짧게 요약해서 체험한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아 이 참에 정리를 한 번 해 보았다. 


나도 불완전한 사람이기에(사람은 누구나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체화하니 타인에게 화가 덜 나기 시작하기도 했다.) 언제든 친절하게 살지는 못하고 있지만, 확실히 이렇게 살기로 하고 나서 이전보다 내가 행복해진 것은 사실이다. 주어진 상황이라든지, 이런 것들도 무척이나 중요하겠지만. 


이 영화로 말미암아 자기 나름의 더 행복하고 의미있는 삶을 쫓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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