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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 Feb 08. 2021

눈 오는 날.

 나는 여성이고 노동자죠.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민주주의가 행해지는 곳에서는 두 가지 정체성 모두 어떠한 경우에도 존중받을 수 있는 인격들이지만, 실제로 내 몸뚱이가 발을 디딛고 서 있는 도로 위의 세상에서는 둘 다 언제나 천대받기 좋아요. 친구가 말했어요. 그가 나를 창녀라고 불렀어. 몸을 함부로 굴렸다고 내 어깨를 밀쳤지. 나는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는데 어딘가에 머리를 부딪혔나봐. 잠깐 정신을 잃었어. 눈을 뜨고 보니까 내 몸이 정말 창녀같은 거야. 나는 친구에게 말했죠. 나도 너도 창녀야. 그러니까 괜찮아. 우리가 다 같이 창녀가 된다면 아무도 너를 창녀라고 부를 수 없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우리는 더욱 더 기를 쓰고 창녀가 되고 미친 년이 되야지. 친구는 울었어요. 나는 이제 그럴 힘도 없어.


 노동자는 몸을 쓰죠. 팔 수 있는 게 몸 밖에 없어요. 노동자는 주식을 모르고 잉여를 몰라요. 아침이 되면 그저 눈을 뜨고 이불을 개고 밥을 먹어요. 김이 나는 따뜻한 국물이 속을 따뜻하게 해줘요. 운좋은 노동자 앞에는 또다른 노동자가 국그릇에 숟가락을 담그고 천천히 움직이는 팔로 음식을 몸으로 배달합니다. 

 불행한 노동자 앞에는 무가 있겠죠. 그러나 그것은 불행일까요. 불행 위에 있는 불행은 불행인 것처럼 보이지 않아요. 

 

 한밤동안 온 세상에 눈이 쌓였어요. 내 시야가 내다볼 수 있는 저 끝까지 모든 게 희기로 작정했어요. 출근길의 노동자는 몇 겹의 옷을 입고 두터운 걸음을 내딛습니다. 아직 아무도 걷지 않은 눈길 위에 발자국을 남깁니다. 움푹 패인 발자국 위에 또 눈이 쌓이겠죠. 노동자가 남길 수 있는 건 눈 위의 발자국 정도인데, 그것은 금세 다른 눈송이가 메울 수 있는 거예요. 그래도 노동자는 씩씩하게 걸음을 걷고 당도해야 할 곳에 가서 몸을 움직이기로 합니다. 숟가락질을 할 수 있는 일용할 양식들을 위해서. 

 노동자가 일하는 공간에서는 간간히 웃음이 끼여들겠지만 결국엔 허무와 권태가 공기를 점령합니다. 노동자는 사랑을 생각하거나 무無를 생각합니다. 생각하는 노동자는 묻습니다. 세상은 어떤 곳입니까? 아직 창녀가 되지 않은 친구는 말했죠. 엉망진창이죠. 그런데 있잖아요 캐런, 그래도 가끔씩은 사는 게 정말 좋을 때가 있잖아요? 사는 게 나쁘지 않고 괜찮을 때도 있고요. 그래서 저는 되도록 나쁜 세상을 꿈꾸지 않기로 했어요. 


'눈으로 덮인 채, 눈 속에 파묻힌 채 온화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자여. 비록 전망은 앙상했지만 그래도 생은 아름답지 않았는가.' 발저는 '크리스마스 이야기'라는 글에서 저렇게 쓴 적이 있어요. 실제로 그는 크리스마스 아침 죽어 눈 속에 파묻힌 채로 어린 아이들에 의해 발견됐어요. 생이 아름다운 건지 뭔지 모르는 노동자라도 그의 글이 아름답다는 것은 느껴요. 사는 게 좋았던 순간을 기억하기 때문에 나쁜 세상을 꿈꾸고 싶지 않는 어리고 따뜻한 마음도 느끼죠. 나를 창녀라고 부르지 않을 그가 나를 바라줄 때의 따뜻함도 느끼죠. 그런 따뜻함들은 몸으로 마음으로 혈관으로 세포들 사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요. 그래서 노동자는 기상 일보에서 한파 특보가 내려져도 권태와 허무를 짊어지고 추위를 맞으면서 발자국을 옮겨 발벌이를 하러 길을 나설 수 있습니다. 아주 웃긴 일이에요. 


 창녀가 되어버린 친구는 침대 위에서 우울을 덮어쓰고 죽음에 대해서 생각할까요. 그 남자를 사랑했던 마음에 대해서 생각할까요. 어느 쪽이든 내 마음도 아픈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겠죠. 그 애가 이 시간을 그저 걸어갔으면, 그래서 다음 시간을 마주하면 사는 게 정말 좋을 때도 있다고 내게 말해줬으면 좋겠어요. 


 생은 하나의 단어가 아니라서, 생이 아름답다고 나는 말할 수가 없어요. 궁시렁거리면서, 자유라고 믿으면서, 어쩌다 살아온 내 시간들을 대놓고 착각해보자면, 생은 대부분의 경우에 농담이거나 고통이에요. 내 주제에 고통을 입에 올리는 게 듣는 이에게 성가시게 들린다면, 그것을 추잡함이라고 바꿔 써도 좋아요. 좋은 냄새는 장난처럼 섞여 있어요. 나는 술래 잡기 놀이를 하듯이 그것들을 찾아 헤매요. 어쩌다 친절한 술래를 만나면 그는 쉽게 나를 안아주고 나는 그의 냄새를 맡고 따뜻하다고 속삭여요. 그런 순간. 그런 순간 때문에 계속 살 거예요. 그런 순간이 다른 모든 추찹한 순간들을 이길 때까지는요.


 나는 내가 아직 되어보지 못한 창녀가 되어버린 친구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할지 모르겠어요. 하, 이 모든 말이 무소용하겠죠. 그래서 나는 지금 다시 무無로 살금살금 돌아가기로 했어요. 아름다운 순간이 오기 전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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