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취향 3: LUSH
모처럼 방학 때 아이와 큰 맘을 먹고 강남역 거리를 구경하러 간 적이 있다. 너에게도 큰 도시를 보여주리라 마음을 먹고 2층 광역 버스를 타고 맨 앞자리에 앉아서(실제로는 맨 앞자리가 매우 멀미 난다) 강남역 대로 한 복판 정류장에서 내렸다. 아이와 손을 잡고 분주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매장을 구경했던 생각이 난다.
대형 프랜차이즈로 가득한 강남대로 거리에서 아이의 관심을 끌 만한 상점들이 마땅치 않아서 고민하던 차에 러쉬 매장 근처를 지나게 되었다. 매장 앞 그릇에는 눈을 끌 만한 커다란 거품 더미와 향기로운 향이 인상적이었고 아니나 다를까 아이는 호기심을 가지고 살펴보았다. 이에 놓칠세라, 그때가 매장이 붐비는 시간대가 아니라서 그랬을지 모르겠지만, 친절하고 다정한 직원들이 아이에게 다가와 이런저런 질문을 하고 다양한 비누와 제품들을 테스트해 보도록 도와주었다. 그때 내 솔직한 마음은 매장 안으로까지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이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그래 모처럼 서울 구경 왔으니 한번 경험해 봐라, 얼른 구경하고 나가자 라는 심정이었다.
매장 내에 다양하고 신기한 디자인과 색상의 비누들, 기분 좋은 향과 친절하게 웃음 짓는 직원들, 깔끔하고 트렌디한 매장의 디스플레이 등 나의 마음과 눈을 사로잡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다만, 그때까지도 나는 '러쉬 = 뭔가 트렌디해 보이긴 하지만 쓸데없이 비싼 가게 '라는 인식이 강해서 얼른 아이를 데리고 나갈 생각에 제품을 자세히 보기도 않았고, 직원의 응대에도 시큰둥하게 응수했다. 난 여기서 절대 물건을 사려는 손님이 아니니, 괜히 친절하게 시간과 에너지를 쓰시지 말라는 나의 소극적인 배려이기도 했다.
내 마음 속 의도를 전혀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도무지 매장 밖을 나올 생각을 안 했다. 기분 좋은 촉감과 향에 아이는 푹 빠져서 끊임없이 다른 제품들을 테스트해보고 싶어 했다. 엄마인 내가 중간에 끊으려고 해도 쉽지가 않았다. 그러던 중 직원분께서 아이가 관심을 보이던 비누 중 테스트 제품이 아닌, 새 제품 하나를 턱! 하니 세면대에 풀어주시는 게 아닌가!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아.. 그냥 나갈 순 없겠구나.. 뭐라도 하나 사야겠다. 죄송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자, 그럼 여기서 가장 가격이 그다지 비싸지 않으면서도 적당한 물건 딱 한 개만 사서 아이를 데리고 얼른 나가야지 라는 생각에 나는 이르렀다. 그때 처음 설명을 들으면서 알게 되었는데, 러쉬 매장 정면과 벽을 가득 채운 형형색색의 화려한 비누들은 배쓰밤과 버블밤으로 구분되어 있다는 사실을. 배쓰밤은 성분에 따라 몸을 촉촉하고 부드럽게 해 주는 역할이고, 버블밤은 모양과 비누색에 따라 거품을 내게 하는 역할이란 것을. 그렇다면 이 중 한 개만 얼른 사서 가야지 할 때 아이가 고른 제품은 버블밤의 한 종류였다. 추운 겨울 날씨여서 버블밤만 사용하기엔 몸이 너무 건조할 것 같아, 결국 배쓰삼도 한 개 더 고르게 되었다. 목욕 한번 기분 내는 데 몇 만 원이 깨지다니. 너무 돈이 아까운 것 아닌가 하는 생각뿐이었다. 물론 예쁘고 향도 좋고, 실제로 촉촉했다. 그렇게 나의 첫 번째 러쉬의 추억은 두 종류의 밤을 사고 나서야 아이의 손을 잡고 나올 수 있었다.
문제는 아이가 러쉬 매장만 보면 그때의 기억이 나서인지 들어가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두 번째부터 방문하던 매장들은 그전 매장처럼 여유 있고 세세하게 응대를 해 주시진 못했다. 나 역시 크게 물건을 사야 한다는 부담감도 없었고 대강만 구경을 하고 나오곤 했다. 그런데 아이가 생일을 앞두고 받고 싶은 선물로 전에 갔던 러쉬 매장에 가서 초콜릿 향이 나는 바디워시 제품을 꼭 사고 싶다는 것이었다. 초콜릿 향이 나지만, 음식은 아니고 샤워할 때 몸에 바르는 바디제품이었는데 당시 내 기준에는 가격이 비싸서 사주지 않았는데 그걸 계속 마음속에 품고 있었나 보다. 결국 우리는 일 년 전에 갔었던 그 러쉬 매장에 가서 초콜릿 바디워시 제품을 샀다. 커스텀 포장 스티커 기계도 있어서 아이가 원하는 디자인과 이름을 새길 수도 있어서 아이에게는 정말 특별한 선물이 되었다.
이후에도 아이의 러쉬 매장 사랑은 계속되었다. 겨울에 정전기에 가득한 머릿결을 휘날리면서 매장에 들어가는 바람에 러쉬의 시그니처 헤어미스트 제품(슈퍼밀크)도 알게 되었고, 신기하게도 그걸 직원분이 뿌려주시니 머릿결이 한결 정돈되어 귀가 얇은 엄마는 또 지갑을 열어 샀다는 이야기. 아이가 다니는 피아노학원 선생님께서 항상 아이에게 달콤한 솜사탕 냄새가 나는데 왜 그런지 알려달라고 하셔서 이 제품 때문인 것 같다고 링크를 보내드린 적도 있다.
그 외에도 아이 정수리에서 해결되지 않는 머리 냄새를 잡기 위해 추천해 주신 샴푸를 사기도 했고, 나의 피부 건조함을 위해 권해주신 제품들도 아주 잘 쓰고 있긴 하다. 제품 라인도 단순히 비누뿐 아니라, 헤어나 바디, 향수 등 형태와 재료 및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아이나 내가 바디, 헤어 쪽의 어떤 고민이나 문제가 생길 때마다 병원처럼(?) 가서 상담도 해 보고 그에 맞는 제품들을 내가 살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사서 써 본다.
시간이 흐르고 여러 번 좋은 경험들이 쌓이면서, 솔직히 지금은 내 마음속에서 비싸서 꺼려지고 멀리하는 마음의 장벽이 조금은(아니 꽤 많이) 무너졌다. 한번 사면 오랫동안 꽤 만족스럽게 사용하고 있긴 하다. 특별히 어딜 여행을 가거나 호텔을 갈 일이 있으면 아이가 좋아할 만한 배쓰밤이나 버블밤을 하나 사주고 하룻밤의 사치(?)를 누리기도 한다.
영국 런던에 갔을 때에는 근교 도시인 브라이튼에 가서 러쉬 매장을 아이가 먼저 찾기도 했었다. 그때 영어가 서툰 나는 타국의 러쉬 매장을 쭈뼛쭈뼛한 두려운 마음으로 들어갔었는데, 신기하게도 한국 직원이 계시는 것이 아닌가. 아이와 나는 놀랐고 반갑게 인사를 했던 기억이 났다. 다만, 그 매장은 헤어를 더 강조를 둔 미용실과 같은 가게라고 설명을 해주셔서 신기했던 기억도 있다. 잘은 모르겠지만, 향후 러쉬의 사업 확대 방향성을 나타낸 것인가 싶었다.(한국 러쉬의 향후 사업 방향은 어떻게 될는지는 나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연히 시작된 러쉬 매장의 거품에 홀려 들어간 발걸음이 나와 아이를 여기까지 이끌게 되었다니.
지금 우리 집 샤워실 두 칸의 트레이에는 첫 번째 칸에는 엄마의 러쉬 제품들이, 두 번째에는 아이의 러쉬 제품들이 있다. 서로 보물처럼 엄청 아끼고 좋아하는 제품이라, 다른 사람의 제품을 쓰기 위해서는 꼭 허락을 받아야 한다.
왜 자꾸 우리 모녀는 러쉬의 매력에 빠져드는 걸까. 목욕을 하면서 아이와 나는 제품을 쓸 때마다 향과 촉감에 거품에, 잠시 위로와 기쁨을 얻는다. 돈으로 산 제품이 나에게 위로를 준다니. 너무 속물 같지만 진짜 그러하니 신기하다. 제품을 사용하면서 느끼는 실제적인 기능적인 만족도 물론 있다. 한 번 사면 꽤 오랫동안 쓸 수 있으니 이 정도면 이 가격의 가치는 있는 거 아닐까 라며, 나의 소비를 혼자 변명해 보기도 한다. 돈을 써 봐야 취향을 알게 되는 걸까.
여전히 아이는 어느 쇼핑몰, 백화점을 가도 " 어, 러쉬다!"라고 외치고 그러면 나는 손을 잡은 다음 "오늘은 못 가! 안 갈 거야!"라고 말해 놓고는 잠시 고민하다가 " 음.. 그럼 구경만 한번 해 볼까? 오랜만에?"라고 외치는 의지박약 엄마이다. 공짜 상품권 뭐 또 없나 괜히 빈 서랍을 열어본다.
[참고]
* 러쉬 코리아: 프레쉬 핸드메이드 코스메틱 러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