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하는 고생길
추운 날씨에 발이 건조했는지 발등이 빨갛게 부었고 까졌다. 어그 부츠를 신고 다닐 것을 일반 운동화를 신고 다녔었는데 그게 꽤 추웠는가 싶다. 아무래도 진료를 보고 약을 받으러 내일 피부과를 다녀와야지 싶다. 지난주 아이의 방학을 맞아 서울 나들이를 다녀오면서 한파에 많이 걸었던 것이 무리가 되었나 보다. 나이가 드니 한파가 그렇게 무섭고 힘들다. '살을 에이는 듯한 바람과 추위'라는 표현이 딱이다.
여름 방학도 만만치는 않다. 지난 여름 방학, 모처럼 여의도 구경을 가기로 아이와 약속을 했었는데 하늘에 마치 무슨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기록적인 폭우가 이른아침부터 내리는 것이 아닌가. 정말이지 다 포기하고 집에 있고만 싶었다. 아이가 실망을 할까 봐 내가 먼저 약속을 깨지는 못했는데 아이의 뜻은 확고했다. 비가 많이 와서 우산과 우비를 챙겨서라도 가고 싶다는 것이다. 솔직히 정말 집에 있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폭우를 뚫고 여의도에 도착했다. 우산을 쓰더라도 가방과 옷이 거의 젖었고, 신발은 이미 물이 가득 차서 포기한 상태였다. 이런 날 굳이 와야 했나? 더 단호하게 거절하거나 설득하지 못한 나 자신이 무능하게 느껴졌고, 이런 날 오자고 고집을 부렸던 딸도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아이와 손을 꼭 잡고 우산을 쓰면서 젖은 신발을 끌며 여의도 길을 가고 있는데 공원의 황토길을 우연히 발견했다. 평소에 비가 오지 않을 때는 황토 건강길로 맨발로 산책을 할 수 있도록 조성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폭우가 쏟아지다 보니 황토길이 완전히 진흙탕길로 변해져 있었다. 나는 옷에 행여나 튈 세라 조심조심 피해 가는 중이었다. 그때 아이가 하는 말은 완전히 나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말이었다.
" 엄마! 여기 재밌어 보이는데 맨발로 놀아도 돼?"
뭐라고라고라?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가뜩이나 비가 와서 피하기 급급했던 나와는 다르게 아이의 눈에는 그곳이 또 다른 놀이터처럼 보였나 보다. 당연히 안돼지! 라고 말하려는 순간 놀랍게도 내 마음과 시선이 바뀌었다. 오! 그래볼까? 꼭 안 될 이유는 없지 않나?
" 그래! 대신 넘어지지만 않게 조심해!"
내가 처음 했던 생각과 전혀 다른 말이 나도 모르게 나와서 놀랐다. 아이는 신이 나서 우산을 든 채로 크록스 신발을 벗어던지고 맨발로 비와 황토가 뒤범벅이 된 길을 발바닥을 더럽혀 가며 신나게 혼자 걷고 또 걸었다. 아이가 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웃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정말 오랜만에 본 것 같다.
시간이 지나자 나도 그렇게 해 보고 싶었다. 엄마인 나도 샌들을 벗어던지고 장대비가 쏟아지는 그날 맨발로 아이의 뒤를 따라 진흙탕물로 뒤범벅이 된 황토길 몇 바퀴를 걸었다. 미끄럽고 철퍼덕한 그 느낌이 너무 낯설었지만 재미있었다. 누군가가 봤다면 우리 모녀를 제정신이 아니라고 여겼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다행히 그때 그곳은 아이와 나 단둘이었다. 온 세상이 비가 내려서 시끄럽고 불편하고 젖어있는 그때에 나와 아이만가장 즐겁고 행복한 웃음소리를 내면서 황토길을 맨발로 걸었던 그 기억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장면이다.
내가 사는 지역은 대중교통이 편하게 되어 있지는 않아서 승용차가 따로 없으면 아이의 병원조차 가기가 힘들다. 마트, 병원, 동사무소 등 모든 일처리는 차를 이용해야 하는 동네이다. 서울 운전이 익숙하지 않은 나에게는 가고 싶은 곳을 운전해서 가는 일이 너무 부담이 되고 스트레스이다. 아이와 서울을 가려면 첫 번째 통과해야 할 관문은 어린 아이를 데리고 대중교통을 타고 가는 것이다. (참고로 우리 집에서 광역 버스 정류장까지는 도보로 10분 정도이며, 전철역이 지나는 공영 주차장은 차로 10분 정도의 거리이지만, 이른 아침부터 만차인 경우도 많다.) 집에서 버스 정류장 혹은 지하철 역까지 꽤 걸어가야 하고, 중간에 또 기다리며 칭얼대는 아이를 달래며 버스를 타거나 지하철을 갈아타고 한참을 가야 드디어 서울까지 도착을 한다. 말 그대로 산 넘고 물 건너 바다 건너가는 느낌이다.
이층 버스를 처음 봤던 아이는 꼭 저 버스를 타고 서울을 가보고 싶다면서 굳이 텅텅 비어 있는 안전하고 편한 일층 좌석들을 놔두고 이층 맨 앞열에 멀미나는 그 자리에 앉아서 간 적도 있다. 캐리어를 끌고 타는 대중교통은 더 스펙터클하다. 전철을 탈 때 계단으로는 이동할 수가 없어서 꼭 엘리베이터 길이 있는 길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 과정을 겪어보니 장애를 가진 분들이나 노약자분들이 때로는 얼마나 수고롭고 번거로우실까 잠시 헤아려본다.
버스는 캐리어를 놓을 자리가 없어서 아이와 떨어져 앉아야 하고, 전철은 함께 나란히 앉을 자리를 찾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이다. 출퇴근 시간이 아니더라도 사람이 많아서 거의 자리가 없고, 어린 아이가 있어도 선뜻 양보를 받는 일이 흔치는 않다. 가끔 빈 좌석이 계속 없어서 아이가 너무 힘들어하거나 혹은 안색이 좋지 않아서 걱정이 될 때 빈 노약자석이 있으면, 너도 '약자'에 해당하니 앉아도 된다고 하며 얼굴에 철판을 깔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들 사이에 앉히기도 했다. 어른들은 아이를이뻐하시기도 하고 대견해 하시면서 주머니에서 사탕이나 초콜릿 등의 간식을 꺼내서 주시기도 했다. 대중교통을 타고 가면서 아이는 세상을 배우고, 사람들을 만나고, 자신의 입장과 처지들을 배려받기도 한다. 엄마 아빠의 자동차보다 훨씬 불편하고 번거로운 것은 사실이지만, 아이에게는 이 또한 좋은 경험이다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는 전철이든 버스든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하는 것을 재미있어한다. 교통카드를 대고 통과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어른이 된 것 마냥 신기해 하고 좋아한다.
방학을 맞아 아이와 어딘가를 같이 많이 다니고 싶은데이 놈의 날씨가 당최 도와주질 않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여름 혹은 겨울방학이다 보니 정말 다니기 지칠 정도로 너무 덥거나 장대비가 퍼붓는 장마철이거나, 혹은 한 걸음도 떼지 못하도록 미친 듯이 추운 겨울 날씨이다. 매년 그렇다. 다니기에 적당하고 맑고 화창한 날씨가 있는 방학은 내 욕심이겠지. 나는 왜 이토록 추운 겨울에, 혹은 무더웠던 여름에 굳이 집을 나가서 생고생을 하는 걸까.
유명하고 멋진 어떤 장소에 가서 구경을 하고 사진을 찍고, 경험을 해 보는 것은 물론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자체만이 여행의 목적은 아니다. 아이와 함께 떠나는 우왕좌왕하는 그 시작점부터 우리의 여행은 시작된다. 함께 떠나면서 아이는 문제를 만나고 불편함을 겪는다. 방안을 찾게 되고, 쩔쩔매고 있는 엄마를 돕는다. 이전에 편하고 익숙한 곳과는 다른 불편하고 낯선 세상을 만나고 다양한 사람들을 경험한다. 생각하지 못한 사건들 속에서 황당한 웃음이 터지기도 하고, 둘 만의 특별한 추억을 만들기도 한다.
무언가를 수고롭고 귀찮게 알아보고 예약을 하고, 스마트폰 지도를 보면서 시내버스와 전철도 갈아타며 길을 찾아가고, 애써 찾아간 맛집에 실패를 하고, 생각지도 못한 더위와 추위에 매번 당하면서도 내가 아이와 손을잡고 어딘가로 떠나는 이유이다. 이 모든 과정이 고생스럽지만 기쁘고, 그렇게 아이와 함께 성장하는 순간들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