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 탐험가 스캇이 마지막으로 한 일
그냥 다 포기하고 왔던 길을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한국-유럽 간 비행시간과 맞먹는 10시간 이상의 자동차 이동을 마칠 때 까지만 해도 고지가 코앞인 줄 알았다. 노르웨이가 바로 코앞인 북해를 건너는 뱃길에서 복병 중 복병을 만나버렸다. 자동차 이동 시간은 워낙 길어서 그렇다 쳐도 적어도 덴마크에서 노르웨이로 넘어가는 페리 안에서는 장시간 동안의 자동차 이동의 여독을 풀며 쉴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결국 배 안에서의 2시간은 고생의 절정이 되어버렸다. 무슨 나룻배도 아니고, 수십 대의 차도 실어 나르는 이 큰 배가 어떻게 이렇게 심하게 흔들릴 수 있는지가 신기할 지경이었다. 차라리 놀이동산의 바이킹은 움직임의 방향을 예측이라도 할 수 있지, 바텐더가 흔들어 재끼는 칵테일 마냥 1초도 쉬지 않고 상하좌우로 흔들리는 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반 평 남짓한 화장실 한 켠에서 손잡이 하나를 의지해서 한순간 한순간을 버티는 것 밖에 없었다. 노르웨이로 향하는 배안에서 나는 최악의 배멀미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나중에 들었지만 화장실 밖의 배상황도 난리였다. 선체가 얼마나 심하게 요동을 쳤던지, 식탁위에 있는 커피잔이 트램폴린을 탄 듯 점프를 하고 쌓다둔 접시가 와르르 쏟아져 내리며 온 데서는 놀란 아이들의 울음소리였다. 멀미 증세를 참지 못한 사람들이 화장실 칸을 모두 매웠고 그 중 아마도 가장 심했던 사람이 나였지 싶다. 화장실 칸에 몇 개 되지 않아 뒤에 기다릴 사람들을 생각해서 나오고 싶었지만 1분을 마다하고 세차게 흔들리는 통에 도저히 속을 진정시킬 틈이 없었다.
뱃길로 남극 탐험을 떠났던 노르웨이인 아문센 그리고 이보다 먼저 출발했던 영국 해군 스캇. 이들 앞에선 내가 정신을 못 차렸던 세 시간동안의 풍랑은 아마 산들바람 정도로 밖에 느껴지지 않을 것 같았다. 희한하게도 그렇게 배로 시달려서 도착한 노르웨이에서 처음 간 곳은 다름 아닌 아문센이 남극 탐험을 했던 배와 여정을 전시해 놓은 프람Fram 박물관이었다. 워낙 온몸으로 겪은 고생의 기억이 생생했던 터라 이들의 뱃길에서의 수개월 간의 여정이 예사로이 보이지 않았다.
아문센과 스캇은 1910년 비슷한 시기에 세계 최초로 남극 탐험을 떠난 이들로 영국인인 로버트 스캇은 1910년 6월 15일 영국 서부 끝인 카디프에서 출발했고, 로알드 아문센은 이보다 늦은 8월 9일 노르웨이 크리스티안산드를 출발했다. 언제 어떻게 흔들릴 줄 모르는 배안에서 며칠 아니 몇 달 동안을 자고 먹고 생활하기를 계속했던 이들은 가히 보통 사람의 체력과 투지를 가진 사람들이 아닐 것이라 확신이 들었다.
프람은 아문센 일행이 남극에 닿기 위해 떠난 일정을 담은 박물관이지만, 이상하게도 내 마음을 끈 인물은 아문센 보다 로버트 F.스캇이라는 영국인이었다. 스캇은 아문센과 단 몇달 먼저 남극을 향해 떠났지만 단 33일 차이로 아문센에게 자리를 뺏긴 안타까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그의 이야기가 더욱 마음이 짠한 이유는 남쪽의 극점까지 천신만고 끝에 도착했던 팀이 돌아오는 길에서 모두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승자의 타이틀을 가져간 아문센 보다는 스캇의 사연에 더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다.
영국 해군 소속이었던 로버트 스캇은 1903년에 당시 남극의 최 남단에 도착한 탐험 이래로 지구상의 최남단 지점인 남극점 탐험을 준비했다. 1910년 6월 15일 영국 웨일즈의 카디프에서 출발항한 이들은 같은 해 10월에 호주 멜버른을 도착할 무렵 아문센의 프람Fram호도 남극으로 향하고 있다는 전보를 받게 된다. 남극점 탐험을 놓고 해상왕국 영국과 바이킹의 나라 노르웨이 간의 세기의 경쟁구도로 돌입했던 것이다.
누구에게나 만만치 않은 여정이지만 유독 스캇에게는 난재가 거듭 닥쳤다. 당시 남극의 최남단을 탐험한 기록을 보유한 스캇도 자연이 가혹함은 피할 수가 없었다. 풍랑 때문에 배가 완전히 전복될 뻔한 일 뿐 아니라 얼음이 둥둥 떠 있는 바다에 무려 20일 동안이나 갇혀 있으면서 체력과 넉넉지 않았던 식량이 고갈되었다. 단 3시간 동안의 파도로 맥을 못 추었던 나로서는 목숨을 잃을 뻔한 풍랑의 스케일은 감히 상상도 가지 않을 따름이다. 이 때문에 비껴갔어야만 했던 남극의 한겨울을 직면할 수 밖에 없게 되어 버렸다.
하지만 1911년 8월 스캇은 탐험내내 썼던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경험상 우리는 그 곳에 다달 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다.” 고 말이다. 스캇에게 쓴다는 행위는 단 몇 분 후의 목숨 조차 장담할 수 없는 환경에서도 내일이 있으리라는 에너지와 희망을 생산하는 마음의 엔진이었다. 그 동력이 없었다면 어떻게 14개월이 넘는 항해를 버텼겠으며, 감히 보통사람들은 상상조차 못할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걸을 수 있었을까.
그럼에도 상황은 그리 좋아지지 않았다. 1911년 11월 1월 남극점이 있는 대륙에 도착했지만, 짐 수송을 위해 힘들게 데려왔던 말들이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모조리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기술적으로 온전치 않았던 빙상 차량은 너무 낮은 온도 때문에 얼어 버린지 오래였고, 그나마 데려온 개들마저 아문센 팀만큼 엄격하게 선발하지 않은 탓에 막상 써야할 때에는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결국 영하 40도에 달하는 추위 속에서 장장 수개월을 걸어서 이동해야 하는 여정 동안 사람이 직접 엄청난 무게의 식량과 텐트를 옮기며 이동해야만 했다. 전문가인 스캇에게도 이 탐험이 목숨을 건 여정임을 직감했던 것이었을까. 스캇은 1912년 1월에는 자신을 포함한 5명만 남극을 향한 길을 계속하고 나머지 3명은 베이스캠프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하게 된다.
영국 카디프를 떠난 지 582일 째인 1912년 1월 17일에 5명의 스캇일행은 남극의 점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들은 마땅히 느꼈어야 하는 성취감과 안도감 대신 좌절과 허탈함을 맛봐야만 했다. 그들이 죽을 힘 그 이상을 다해 왔던 남극의 점에는 바로 아문센의 노르웨이 국기가 꽂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누이트 족의 털 옷과시베리아 개썰매의 도움을 받아 이동한 아문센은 모든 짐을 사람의 힘으로 옮기며 영국의 모직 옷으로 남극대륙의 혹한을 그대로 온몸으로 느끼며 힘들게 발걸음을 옮긴 스캇 일행보다 33일 먼저 이곳에 도착했던 것이다. 자신이 스캇보다 선두에 있음을 알았던 아문센은 남극점에 약간의 식량과 편지까지 남겨놓았다. 노르웨이 국기가 눈에 들어왔을 때 스캇과 그의 4명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무려 500일을 넘게 생사의 고비를 넘으며 얼은 발로 가까스로 도착한 그 곳에는 설마했던 것이 현실이 되어 있었다.
그 절망의 순간을 스캇은 이렇게 썼다.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그 간의 모든 꿈이 가버렸다. 이 곳은 정말 끔찍한 곳이다.”
그들에겐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왔던 길을 돌아와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었다. 1912년 1월 19일, 남극점에서 무너지는 가슴을 안고 기진맥진한 몸으로 돌아오는 길에 쓴 스캇의 일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되돌아가는 길이 끔찍하도록 피곤하고 단조로울 것 같아 두렵다.” 육체적 피로에 겹쳐 목표점을 향한 추진력도, 해냈다는 성취감도 얻지 못한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의 감이 옳았을까. 예상을 넘어서는 극한의 추위가 밀어닥쳤고, 이 난관을 겨우 헤치고 기진맥진한 상태로 도착한 곳에서 이들을 데리러 오기로 했던 팀을 기다렸으나, 결국 만나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남극의 한복판에서 모두 추위와 배고픔으로 목숨을 잃고 만다. 이 곳이 그 넓은 남극 대륙 에서도 베이스 캠프 간의 거리가 단 12km 밖에 되지 않는 곳이라 하니, 이 대목에서 가슴이 아팠다. 더 이상 걸을 힘도 없고 도와주러 오는 사람도 없이 죽어갔던 본인들 그리고 이렇게 가족을 잃은 소식을 들은 사람들의 마음은 또 어땠을까. 스캇은 함께 있었던 동료들 중 가장 나중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는 죽음의 코앞에 있을 때 까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기다리지 않았다. 온몸이 얼어붙어 움직이기도 어려웠을 그가 한 일은 다름 아닌 함께 했던 자신의 어머니와 아내 뿐 아니라 죽음까지 자신과 함께 했던 동료들의 가족들에게까지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누구라도 그 편지의 내용은 감사와 미안함을 담은 내용이라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으리라. 내 몸을 가누기도 어려웠을 극한 속에서 죽음 직전의 에너지까지 모두 끌어내어 그는 썼다. 사랑과 그리움의 마음으로 말이다.
스캇은 탐험을 시작했던 1910년 6월 15일 부터 1912년 3월 29일 여정을 기록으로 남겼고, 그것은 후에 이들을 찾으러 간 이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내일을 알 수 없는 탐험 일정에서 스캇에게 쓴다는 것은 죽음의 고비에서도 꿈을 바라보게 해준 등대였다.
또한 그에게 기록한다는 행위는 탐험에서의 어려움을 넘게 해줄 참모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쓰기' 는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담아 남긴 사랑이었다.
노르웨이에서 가슴이 아련해 지는 스캇의 삶을 느끼며, 그의 고생길을 한 치라도 느껴보는 경험을 하며, 도전과 쓰는 행위는 결코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법이 없음을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