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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명숙 Jul 13. 2019

나의 할머니

그녀에겐 이름이 없다. 주민 등록부에 ‘연일(延日) 정 씨’라고만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 시절, 딸내미들은 이름 같은 건 필요치 않았던 걸까? 그래서 그랬던지 시집가기 전에는 그냥 ‘아씨’로 불렸고, 혼인한 후에는 그냥 ‘마님’으로 불렸다. 무명에 걸맞게 존재감마저 없어 누구의 추억 속에도 남지 못하고 사라진 그녀를 이제 와 기억 속에 불러 내어 가계보를 기록하는 것은 내게 남아 있는 미안함과 아쉬움 때문이다. 눈을 감으면 설핏 기운 겨울 햇살 속에 대청마루 모서리에 기대앉아, 전구알에 뚫어진 양말을 씌워 기우다 말고 꾸벅꾸벅 졸던 그녀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떠오른다.


1888년 충청북도 진천에서 정해일과 박 씨 사이에 무남독녀로 태어난 정 씨는 양반집 규수답게 글도 익히고 현모양처의 덕목도 갖추며 순박한 처녀로 자랐다. 넓고 반듯한 이마와 높고 쪽 곧은 콧날은 당시로선 흔치 않았는데, 예쁘다기보다는 잘 생긴 축에 들었고, 여자로서는 드센 인상이었지만, 다행히 처진 눈꼬리와 어설픈 입모습이 부드러움을 보탰다.


경기도 광주 태생의 세 살 어린 독자 남원 윤 씨와 결혼한 정 씨는 서울 사대문 안에서 마님 소리를 들으며 잘 살았던 듯하다. 그러나 줄줄이 낳은 자식들은 어릴 때 병사하고, 남편은 금광 사업에 손을 대 재산을 거의 다 날려버렸다. 서울 땅마저 명동성당에 매각되기에 이르자 경기도 광주 분원으로 다시 낙향했고, 그 과정에서 맘고생이 컸는지 남편은 1929년 39세로 세상을 떠났다. 마흔두 살에 홀로 된 정 씨에게는 의지할 친정도, 시집도 남아 있지 않았다. 외로운 처지에 덜렁 외아들 하나만 남았고, 그분이 바로 내 아버지다.


양반집 2대 독자 내 아버진 경복 고등학교 전신인 제이 공립 고등 보통학교에 15세의 이른 나이로 합격했다. 일제강점기에나 지금과 같은 초등학교가 생겼기 때문에, 당시 사진을 보면 아버지의 동급생들 중에는 뒤늦게 입학한 수염 난 애아범들이 많았다. 과묵하기로 유명한 내 할머니에게도 아들 자랑 레퍼토리가 하나 있었으니, 분원초등학교 교장선생이 처음으로 서울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한 아버지를 당신 어깨에 무동을 태워 서울 올라가는 역전까지 배웅을 했다는 얘기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사람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아들이 그만 졸업을 코앞에 두고 자퇴를 해버렸다. 하던 공부 박차 버리고 영화감독 나운규를 따라 팔도강산을 헤매고 다녔으니 그 어머니 마음이 어떠했겠나.       

제이공립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의 내 아버지(16세), 요새 <WWW>에 나오는 장기용 급 인물이다.


24살이 되자 그 아들은 동네 처녀에게 홀랑 빠져 당시로선 흔치 않던 뜨거운 연애결혼을 한다. 며느리는 광주 퇴촌 근처에서 크게 포목점을 한 최부자댁 첫째 딸이었다. 그 시절에 양반집 도련님이 중인 집 딸과 자유연애한 것은 동네에 자자하게 소문이 날 만한 일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며느리를 들인 정 씨는 시어머니가 되었고, 자기와 달리 아이들을 순풍순풍 건강하게 나은 며느리 덕에 손주들 키우느라 정신없이 바빠졌다. 성품이 다정한 며느리는 오직 일하는 것을 낙으로 삼는 시어머니에게 살갑게 굴었다. 하지만 시집오기 전 곱게 자란 것을 핑계 삼아 온갖 집안 살림을 나 몰라라 했고 언제나 묵묵히 일만 하는 할머니 정 씨의 허리에는 늘 축축한 행주치마가 걸려 있었다.


가족이나 친지의 존재가 내 기억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6살 무렵부터다. 그때 할머니는 50대 중반의 건장한 중년 여인이었다. 워낙에도 궂은일은 혼자 도맡아 했지만, 내가 열 살 때 남동생이 태어나고는 할머니 역할이 더 커졌다. 우리 자매는 오로지 할머니 손에 컸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정 씨와 큰 손녀(내 언니)


할머니는 첫 손주인 언니를 귀애하면서도 외탁한 것을 못마땅해했다. 다섯 살이나 어린 나를 언니와 빗대 놓고 언니를 나무라길, 생각하는 게 동생만도 못하다는 둥, 게으른 베짱이를 닮아서 늙으면 고생할 거라는 둥, 지나치다 싶을 만큼 마뜩잖아했다. 외할머니 닮아 명랑하고 발랄한 언니는 경망스럽다 하고, 당신 닮아 뚱한 나는 속이 깊다고 했다. 언니를 되바라졌다고 생각해서 늘 “발라깽이”라고 불렀는데, 훗날 큰 손녀가 청상과부로 기구한 팔자가 될 것을 알았다면 차마 그렇게 부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내가 봐도 외할머니를 많이 닮은 내 언니는 정 씨 할머니와는 데면데면한 사이로, 툭하면 외할머니 편에서 정 씨 할머니를 흉봤다.


외할머니는 내 할머니보다 5살 연상으로 1885년에 태어나신 것으로 추정된다. 두 분은 하나에서 열까지 비슷한 데가 없었는데, 우선 태생부터가 달랐다. 외할머니는 상민 출신으로 일찍이 궁에 들어가 궁녀 생활을 했다고 들었다. 나라가 망해가자 궁에 물건을 납품하던 포목점 최 씨에게 왕실에서 전례 없이 궁녀를 내주었고, 그렇게 두 분은 가약을 맺었다고 한다.


내 기억 속 외할머닌 언제나 비단옷을 입고 안방 아랫목 방석 위에 떡하니 앉아 긴 담뱃대를 물고 계셨다. 누군가를 부르려면 장죽으로 딱딱 놋 재떨이를 두드렸는데, 항시 대기하고 있던 며느리 셋 중 어느 하나가 냉큼 달려오곤 했다. 좀 꾸물거리기라도 하면 불호령이 떨어졌는데, 궁에서 시녀들을 부리던 버릇 때문이었으리라. 눈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의 흠 잡기를 재미로 삼았고, 입만 열면 자동으로 흔히 들을 수 없는 찰지고 해괴하고 창의적인 욕을 해댔다. 궁에서 사용하던 그들만의 언어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흠담이 걸핏하면 내 할머니 정 씨를 향했다. 출신에 대한 자격지심이 부추긴 일이었을 것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품격이 내 할머니에게는 있었으니까.


말하자면 할머닌 격이 다른 분이었다. 한동네에 살면서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사돈을 할머니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원래 말이 없으신 건지 아니면 일찍 홀로 되는 바람에 성품이 바뀌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속을 드러내지 않는 데다 표정도 없어 사람들이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분이었다. 이웃과 사귀는 법도 없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간간이 며느리를 통해서나 들었으며, 심지어는 아들과의 대화도 며느리를 거쳐 소통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나는 그녀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잘 읽어내었다. 격이 높았던 그녀의 유머도 나 혼자 이해하고 미소 지었다. 사는 건 외할머니만 못해도 내 할머니가 매사에 한 수 위라고 나는 생각했다.


물론 할머니 역시 나를 알아본 유일한 사람이었다. 늘 나를 괴롭히던 앞집의 못된 친구의 오라비를 참다 참다가 두드려 팬 일이 있다. 그러고 집에 들어선 나를 보고 할머니가 엄마한테 “쟤 화나면 무서운 애야”라고 말했다. "멸치 똥 다 따는 뚝심"으로 크게 될 것이라고 했던 할머니의 평가와 인정이 나의 무던함과 인내심을 키웠다면, "화나면 무서운 애야"라는 말은 필요할 때 에너지를 폭발시켜 용단을 내리고 정면에서 문제에 부딪기게 만드는 말 한마디였다. 내 성격 형성에 할머니는 누구보다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그런가? 할머니를 기억하는 건 나뿐인 것 같다. 동생들도 다 할머니 손에서 자랐건만, 배은망덕하게도 이것들은 기억을 못 한다. 이래저래 정 씨는 오롯이 나만의 할머니로 남았다.


1966년 겨울, 친정 근처 판자촌 집에서 아들 둘을 키우며 살 때였다. 갑작스러운 동생의 전갈을 받고 한달음에 달려가니, 할머니는 이미 마지막 숨을 거두신 뒤였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손자하고 아침밥을 잘 드시고 숟가락을 놓자마자 앉은 그대로 숨을 거두신 것이다. 마지막까지 맡겨진 일을 다 하시고, 험한 모습 보이지 않고 이생을 홀홀 털어 저리 홀가분하게 떠나시다니... 


마지막은 저런 모습이어야 한다는 바람이 내게도 생겼다. 할머니는 78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그러니 나는 벌써 3년이나 더 긴 생을 살고 있는 셈이다. 할머니, 아들 며느리 다시 옆에 끼고 지내시니 외롭지 않으시죠? 당신 쏙 빼닮은 손녀도 곧 갈 테니 기다리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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