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살다가 한 번쯤 스스로도 놀랄 만한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하거나, 감정을 느끼거나, 자신도 모르게 내면에서 은밀히 계속되고 있던 뭔가를 불쑥 알아차릴 때가 있다. 사소해 보이는 일 때문에 감정이 폭발하고 나면 ‘내가 이런 강렬한 감정을 계속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었구나’ 하고 불현듯 깨닫는다. 이를테면 이런 경우다.
당신은 야근이 잦은 배우자를 대신해 밀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불쌍한 사람, 회사에서 얼마나 힘들까.’
그런데 배우자가 퇴근길에 세탁소에 들러달라는 당신의 부탁에 잠깐 망설이자 당신은 쏘아붙인다.
“됐어! 내가 할게!”
약속 시간이 다 됐는데 친구가 전화로 약속을 취소한다.
“갑자기 일이 생겨서, 미안.”
그러자 당신은 자신도 놀랄 만큼 화가 치밀어 오른다. 지난 수년 동안 이런 식으로 배려해준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 이 친구가 당신 생일을 잊어버린데 대한 감정도 아직 풀리지 않았다. 알고는 있었지만 애써 외면하고 있던 진실이 이제야 선명하게 보인다. 이 친구는 당신보다 다른 사람과의 우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여섯 달 전 어머니가 오랜 투병 끝에 돌아가셨다. 투병 기간 동안 슬퍼할 만큼 충분히 슬퍼했고 마침내 죽음으로 어머니의 고통이 끝났을 땐 오히려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슬픈 영화를 보다가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한 당신은 자신이 엄마를 너무도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는 의식하는 자아가 우리의 전부라고 믿지만,
정작 중요한 감정은 몰래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달갑지 않은 의무나 잡일을 ‘잊어버리면’ 사람들은 그 뒤에 무의식적인 동기가 숨어 있다고 추측한다. 그 일을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망각이라는 행위로 드러난 것이라고 말이다. 배우자가 기념일을 ‘잊어버렸을’ 때 아무 의미도 없는 실수라고 넘길 사람이 몇 이나 될까?
타인이 스스로에 대해 알아채지 못하는 면모를 우리는 안다고 믿곤 한다.
회사 점심시간에 한 직원이 자리에 없는 다른 직원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쓴소리 듣기 싫어하는 사람인데 내가 괜한 말을 했나 봐. 그 사람은 자기가 완벽한 줄 알거든.”
오래 알고 지낸 친구들은 자 리에 없는 친구와 그의 새 애인에 관해 이러쿵저러쿵한다.
“왜 또 제 멋대로인 여자를 만나는 거야? 자기 엄마랑 똑같은 여자잖아!”
마음을 고쳐먹고 새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는 친구의 말을 들으며 우리 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자기를 그렇게 모르나?’
우리는 주변 사람들을 꿰뚫어볼 수 있다고 가정하면서도 남이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면 쉽게 발끈한다. 내가 모르는 내 면모를 남이 볼 수 있다고 생각하면 불쾌해지는 것도 당연하다. 친구가 그런 암시를 보이면 우리는 아니라고 우길 것이다. 혀가 미끄러져 말이 헛나간 거지 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니라고, 직장 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저녁 데이트를 잊었다고, 손님 명단에서 이름을 빠뜨린 건 단순한 실수지 그 사람이 작년 크리스마스 파티 때 나를 무시한 데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고.
가끔은 정말로 직장에서 너무 시달려 깜박할 때도 있다. 가끔은 정말 아무 의미 없는 말실수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의식하지 못하고 자신에게조차 인정하고 싶지 않은 뭔가를 실수로 남에게 들켜버릴 때도 있다.
자신보다 타인의 무의식적 동기를 더 쉽게 알아채는 이유는 무의식의 본질을 생각해보면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
프로이트와 그 이후의 수많은 정신역동 이론가에 따르면, 무의식에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거나 자신의 윤리관・가치관과 충돌하거나 자아상을 해칠 만한 모든 생각과 감정이 담겨 있다. 그러니 무의식에 담긴 내용물을 알고 싶지 않은 게 당연하다. 알고 싶은 생각과 감정이었다면 애초에 무의식에 숨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견디기 힘든 그 내용물을 어떻게 피할까?
남들에게는 보이는 우리 성격의 한 측면을 어떻게 계속 못 알아챌 수 있을까?
바로 여기서 '심리적 방어기제'가 등장한다. 우리는 방어기제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방법을 이용해 받아들일 수 없는 생각과 감정을 의식에서 몰아낸다. 그 과정에서 방어기제는 인간관계나 감정 영역에서 우리의 현실 인식을 미묘하게 왜곡해버린다.
방어기제는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이 누구나 겪는 고통에 대처하기 위해 꼭 필요하고 유용하지만, 너무 깊숙이 박혀버리면 직면해야 할 중요한 감정에 접근 하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
방어기제는 격한 감정을 전혀 다른 곳으로 표출해서 우리가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얻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그래서 문제를 키우거나 심지어는 자멸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무엇보다 안 좋은 것은 애인이나 가족, 가까운 친구, 직장 동료와의 원만한 관계에 필요한 감정까지 몰아내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화살을 돌려버릴 수 있다는 점이다.
자신을 힘들게 하는 감정들을 마주할 때,
숨지 말고 효과적으로 다스리는 법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욕구를 외면하면 타인과 진정으로 친밀한 관계로 발전할 수 없다. 분노나 불행을 과식증처럼 ‘삼켜버리면’, 가정에서건 친구 관계에서건 직장에서건 감정의 원인을 알아보려는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다른 누군가가 자신이 두려워하는 감정을 표출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자기 안에 숨어버리는 사람은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 한정적이고 불만족스러운 관계만 맺을 수밖에 없다.
불행한 패턴이 계속 되고, 친밀하고 헌신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직장에서 똑같은 문제가 반복되고, 친구 관계가 어그러지고, 부모나 자녀와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는데 당신의 방어기제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
소중한 사람들과의 만족스러운 관계를 가로 막는 방어기제를 해체하고, 무의식 속에 든 것을 효과적으로 표출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모든 방어기제를 없앨 필요도 없고, 무의식 속에 있는 모든 것과 꼭 대면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방어가 너무 단단하게 고착돼 인간관계를 심하게 방해하면, 더 의식적이고 융통성 있게 대처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 참고한 책: 『마음의 문을 닫고 숨어버린 나에게』, 조지프 버고 지음, 더퀘스트 | 읽어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