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윤종신>은 한 달에 하나의 신곡을 발표하는 집요한 프로젝트였다.
2017년 12월, 대한민국에 첫 번째 애플스토어가 들어섰다. ‘드디어’였다. 2001년 미국 버지니아의 한 쇼핑몰에서 신사동 가로수길로 오기까지 너무나 오랜 세월이 걸렸다. 애플 팬들의 억눌린 한은 영하 15℃의 강추위를 뚫었다. 새벽부터 300여 명이 줄을 섰다. 개장 이튿날까지 2만여 명이 서울에 세워진 성지에 발을 내디뎠다. 잡스가 떠난 이후로 애플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이 나오고 있었지만, 애플은 여전히 애플이었다.
데이비드 색스의 명저 《아날로그의 반격》에는 애플스토어 탄생에 관한 일화가 나온다. 1997년 스티브 잡스가 애플에 돌아왔다. 애플에서 쫓겨난 지 13년 만이었다. 왕의 귀환이었다. 왕은 제품이 판매되는 현장을 둘러보았다. 한숨이 나왔다. 애플 컴퓨터가 베스트바이, 서킷시티 같은 허접한 매장에서 팔리고 있었다. 델, 컴팩 같은 ‘못생긴 애들’ 사이에서 풀이 죽은 채 전시되어 있었다. 왕의 고민이 깊어졌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제품은 담는 그릇도 달라야 하지 않을까. 왕은 팔을 걷어붙였다. 애플 제품을 고객들에게 직접 선보이는 오프라인 매장을 구상했다. 고객 경험의 끝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 직원들을 리츠칼튼, 포시즌스 호텔에 보내 서비스 교육을 받게 했다.
애플스토어가 대한민국에 상륙했다. 스티브 잡스는 외부의 레이어 없이 고객들과 직접 만나기 위해 애플스토어를 기획했다. <월간 윤종신>은 윤종신식 애플스토어다. 출처 | 애플 홈페이지
잡스를 향한 언론의 조롱이 이어졌다. 몇 개 되지도 않는 제품으로 저 큰 매장을 채우겠다네. 컴퓨터 제조 업체의 오지랖이네. 잡스가 실적이 급한가 보네…. IT 업계를 분석하는 한 애널리스트는 잡스가 구상하는 매장이 2년 안에 철수한다는 전망을 ‘자신 있게’ 내놓았다. 얼마 후 애플스토어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부터 조롱하던 자들은 자취를 감췄다. 애플을 향한 찬가만이 울려 퍼졌다.
<월간 윤종신>은 윤종신식 애플스토어다. 가수 윤종신이 자신의 ‘고객들’과 직접 만나는 지점이다. <월간 윤종신> 앱을 다운받는 순간, 윤종신과 청취자들 사이에 막힌 담이 허물어진다. 웰컴 투 윤종신 월드.
매달 하나의 신곡이 발표된다. 곡의 영감이 되어준 그림과 사연, 뮤직비디오가 곁들여진다. 곡을 중심으로 한 입체적인 경험이 완성된다.
오롯이 윤종신의, 윤종신에 의한 취향 플랫폼이다.
윤종신의 취향과 맞는 사람은 남고, 그 반대면 앱을 지운다. 결속력 높은 취향 공동체가 결성된다.
막다른 골목에서 시작된 프로젝트였다. 2년 동안 공을 들인 11집 앨범이 망했다. 예능인 윤종신은 주가가 높았지만 가수 윤종신은 상장폐지 직전이었다. 실패의 원인은 분명했다. 시대가 변했다. 음원 차트에서는 ‘앨범’이 아니라 ‘곡’이 각개전투하고 있었다. 신곡의 유통기한이 짧아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 순위가 바뀌었다. 오전에 발표한 곡을 두고 그날 저녁에 떴네, 망했네 하는 소리가 나왔다. 가요 시장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
데뷔 20년 차 중견 가수 윤종신은 이런 상황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대단히 후진적인 시스템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불평만 하고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앞으로도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오래오래 하고 싶었다. 난관을 타개할 방법을 모색했다.
윤종신은 어깨에 들어간 힘을 뺐다. 자신에게 다짐했다. 하고 싶은 음악을 만들어 꾸준하게 발표해보자. 호흡을 길게 가져가자. 성공과 실패에 연연하지 말자. 커다란 한 방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자.
모두가 정규냐 싱글이냐를 고민할 때 ‘싱글’을 ‘정기적’으로 내기 시작했다. <월간 윤종신>이라는, 잡지 같은 타이틀을 붙였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실험’이었다. 2010년 3월이었다.
가수 윤종신의 마지막 승부수였다. 잡지처럼 한 달에 한 번씩 곡을 만들어 발표하기로 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창의력과 성실성을 겸비한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출처 | <월간 윤종신> 사이트
세계 최초의 시도였다. 그러나 세상에는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세계 최초도 많았다. <월간 윤종신>이 그랬다. 한 달에 한 곡씩 꾸준히 발표했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당연히 적자였다. 예능인 윤종신이 돈을 벌면 가수 윤종신이 쓰는 구조였다. SM엔터테인먼트의 이수만 회장은 히트하지 못해도 매달 곡을 발표하는 후배를 두고 ‘이상한 놈’이라고 했다(마냥 부정적인 뜻은 아니었다. 2018년 SM엔터테인먼트는 윤종신이 이끄는 미스틱의 최대 주주가 됐다). 꾸준히 가보자는 생각만 했다. <월간 윤종신>의 아카이브가 쌓여갔다.
그해 10월, 가능성을 보았다. 인기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의 참가자였던 강승윤이 <월간 윤종신>에 수록된 곡 ‘본능적으로’를 불렀다. 5월에 발표한 곡이 5개월이 지난 시점에 떴다. 그것도 자신이 아닌 후배 가수를 통해서. 아카이브에 꾸준히 곡을 쟁여두면, 언젠가 빛을 ‘발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시점에,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월간 윤종신>은 서서히 탄력을 받았다. ‘오르막길’, ‘지친 하루’ 같은 노래들이 인기를 얻었다. ‘본능적으로’가 그랬듯 발표하자마자 차트로 직행한 곡들은 아니었다. 한동안 반응이 없다가 잊을 만할 때쯤 차트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왔다.
2017년 6월에 발표한 ‘좋니’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음원 순위 100위권에 머물렀다. KBS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윤종신이 이 곡을 부른 뒤부터 반응이 올라왔다. 그날 방송을 본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윤종신이 이렇게 노래를 잘하는 가수였어?’
라이브 영상 클립이 온라인에서 퍼져나갔다. 그때부터 차트 역주행이 시작됐다. 결국 음악 차트 1위, 음악방송 1위에까지 올랐다. 데뷔 27년 차에 처음으로 경험한 1등이었다. 이후 ‘좋니’에 대한 답가 형식의 곡 ‘좋아’까지 히트했다. 윤종신 태풍은 2배로 커졌다. <월간 윤종신>이 드디어 팔리기 시작했다. 1990년대 감성이 물씬 담긴 곡을 10대와 20대까지 흥얼거렸다. 어린 친구들은 <라디오스타>에 나와 깐죽거리는 ‘개그맨’ 아저씨가 노래 잘하는 ‘가수’였다는 사실에 놀랐다. 2017년은 윤종신의 해였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저마다 ‘좋니’의 히트 비결을 내놓았다. 디지털이라는 그릇에 아날로그 감성을 담았네. 힙합과 아이돌만 넘실대던 가요계에서 틈새시장을 잘 공략했네. 1990년대 아날로그 콘텐츠의 힘을 보여줬네.
모두가 맞고, 모두가 틀렸다. 정작 당사자는 별로 할 말이 없었다. 대중의 취향을 공략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대중의 취향이라는 건 움직이는 과녁이었다. 그걸 공략하는 건 능력 밖의 일이었다. 그렇다고 얻어걸린 거라고 하기에도 모호했다.
윤종신의 답은 심플했다.
본인이 좋아하는 걸 던지고 설득하려 했을 뿐이다.
“이거 되게 좋지 않아?”라고 제안하는 것이 아티스트의 역할이라 생각했다. 윤종신은 ‘좋니’의 성공이 ‘덤’이라고 했다. 윤종신은 아티스트였다.
<월간 윤종신>은 가수 윤종신의 생명을 10년 이상 연장시킨 프로젝트였다. ‘기획자 윤종신’의 재발견이었다. 오늘날의 가요 시장에서 중견 가수의 생존법을 알려주는 확실한 본보기였다. <월간 윤종신>이 팔리는 브랜드가 된 요인은 세 가지였다. 취향 공동체를 꾸렸다. 성실하게 곡을 발표했다. ‘아니면 말고’ 식으로 접근했다. 이 세 가지를 지키는 데 윤종신은 집요했다.
“예수도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언제, 누가 이 말을 해주었는지 기억에 없다. 그대로 심장에 박혔다. 2,000년쯤 전에 예수는 슈퍼스타였다.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이스라엘 전역에서 인파가 몰려들었다. 반면, 예수를 대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결국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이 말을 들은 이후로, 예수가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지 못했다면 나 같은 보통 사람은 말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위로가 됐다.
브랜드도 마찬가지다. 어떤 브랜드도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순 없다. 지금처럼 취향이 파편화된 시대에는 더더욱 그렇다. 요즘 소비자들이 백이면 백 다른 취향을 가지고 있어서다.
100명의 고객을 어설프게 만족시키는 브랜드보다
한 사람의 고객이라도 확실하게 만족시키는 브랜드가 더 사랑받는 시대다.
“내가 제일 안 좋아하는 말이 ‘국민가수’다. 이렇게 다양화된 세상에서 국민가수라는 건 없다고 생각한다.”
윤종신이 국민가수 타이틀을 노리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국민가수가 될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는 없겠지만, 절대로 그걸 목표로 삼지는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그건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고 하는 거니까. 예수도 못 한 일이니까. 윤종신은 자신의 분수를 정확히 안다. 불특정 다수를 만족시키려는 ‘헛된 노력’을 하지 않는다.
윤종신은 팬덤도 부담스러워한다. 팬덤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자 호의다. 팬덤을 받는 입장에서는 팬들이 기대하는 바에 자신을 맞춰야 하는 부담이 생긴다. 윤종신이 원하는 건 이런 것이 아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대중에게 주도권을 뺏기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윤종신이 선호하는 건 ‘취향 공동체’다. 자신과 비슷한 취향을 지닌 사람들이 <월간 윤종신>을 구독해주는 것이다. 이들은 스스로 어떤 취향을 지녔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윤종신이 제안하는 취향이 마음에 들기 때문에 그의 음악을 듣는 이들이다. 팬덤처럼 무조건적인 지지가 아니므로 윤종신 입장에서도 별로 부담이 없다. 이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
결국 윤종신에게 가장 중요한 청취자는 그 자신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닌 자신이 즐길 수 있는 음악을 만든다. 그가 자신의 곡을 제안하면서 “이거 되게 좋지 않아?”라고 설득하는 과정이 자연스러운 이유다. 억지스럽지 않은 ‘윤종신다움’이 만들어진다.
윤종신은 취향을 전달하는 방식에도 신경을 쓴다. <월간 윤종신> 초창기에는 곡만 발표했으나 이후 매거진 앱을 만든 것도 그 때문이다. 음악만으로는 자신의 취향을 온전하게 전달할 수 없었다. 곡을 입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예술 콘텐츠를 담고, 뮤직비디오를 제작하는 식으로 그 부족함을 보완했다. 좀더 친절하고 명확하게 ‘윤종신의 취향’을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맘에 드는 이성을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하고 거절당하는 건 너무 아쉬우니까. 취향을 전달하는 방식이 진화할수록 취향 공동체도 확장됐다.
“아마추어가 영감을 기다릴 때 프로는 작업한다.”
- 사실주의 화가, 척 클로스
성실함은 이 시대에 자주 무시되는 가치다. 노력은 ‘노오력’으로 폄하된다.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노력충’이라는 별명이 붙는다. 성실함을 강조하면 ‘꼰대’ 소리를 듣는다. ‘욜로’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진다. 성실함이 설 자리는 갈수록 좁아진다.
일리가 있다. 저성장이 당연시되는 뉴노멀 시대다. 개인들은 생존 자체가 버겁다. 청년 취업률은 사상 최저 수준이다. ‘사람’ 경쟁자도 많은데 ‘AI’ 같은 기술이 일자리를 빼앗아간다. 부모 잘 만난 금수저들은 회사를 물려받아 떵떵거리며 산다. 보통의 개인들이 성실하게 살고 싶다는 의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성실함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것도 개인의 자유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성실성이 없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남 탓, 사회 탓이 언제나 가장 쉽다.
SBS <힐링캠프>에 출연한 윤종신은 이렇게 말했다.
“천재들 틈에서 음악을 하려면 내 것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죠. 내가 잘할 수 있는 건 평범함 속에 있는 깨알 같은 발견이더라고요. 발명은 천재가 하는 거고, 발견은 성실한 사람이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음악평론가 임진모는 <월간 윤종신>을 두고 ‘지속성의 승리’라고 했다. 윤종신은 엉덩이가 무거운 창작자다. 영감이 떠오를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매일 작업실에 가는 프로다. 한 달에 한 곡을 발표하는 프로젝트를 펑크 내지 않고 10년 가까이 해온 ‘성실함의 화신’이다.
천재가 아니었음에도, 성실함을 갖추니 ‘발견’을 할 수 있었다. 그 발견을 통해 곡을 만들 수 있었고, 아카이브를 쌓을 수 있었다. 이 일을 꾸준히 오래 하니 히트곡이 나올 확률을 높일 수 있었다. 결국 다른 천재들을 이길 수 있었다. 물방울이 오랜 기간 떨어지면 돌을 뚫을 수 있다水滴穿石. 윤종신이 <월간 윤종신>을 통해 증명해냈다.
‘아니면 말고.’
영화 <올드보이>의 박찬욱 감독이 직접 지은 가훈이다. 초등학생 딸이 학교에서 가훈을 적어 오라는 숙제를 받았을 때 이렇게 적어주었단다. 그가 연출한 저주받은 걸작 <복수는 나의 것>이 흥행에 실패한 직후였다. 박찬욱 감독은 《박찬욱의 몽타주》라는 책에서 가훈의 의미를 이렇게 적었다.
“이 경쟁 만능의 사회에서 참으로 필요한 건 포기의 철학, 체념의 사상이 아니겠느냐고 딸에게 알려주었다.”
<월간 윤종신>도 윤종신 버전의 ‘아니면 말고’였다. 매번 히트곡을 낼 수는 없으니까.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럼에도 늘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스스로에게는 나름 만족스러운 결과물이었으니까. 사람들이 언젠가는 알아봐 줄지도 모르니까. 뭐 아니면 말고.
‘아니면 말고’는 음악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음악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음악을 사랑하고 열심히 만들지만 음악보다 가족을 더 사랑하고, 음악에 목숨을 걸지도 않는단다. 그에게 음악 활동은 삶의 거대한 이벤트가 아닌 생활의 일부일 뿐이라고 말한다. 음악과 삶을 동일시하는 여타 아티스트들과는 분명 결이 다르다.
‘아니면 말고’의 효과는 확실하다. 음악에 대한 무게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음악 활동을 즐길 수 있게 됐고, 실패에 대한 강박도 줄어들었다. 어차피 재미있는 거 하는데 실패할 수도 있지 뭐…. 이런 마인드는 <월간 윤종신> 같은 장기 프로젝트를 끌고 나가는 데 원동력이 됐다.
박찬욱, 윤종신처럼 자기 일을 즐기면서 롱런하기를 원하는가?
존경받는 광고계 선배 한 분이 앞으로 자신의 광고 철학은 ‘Quick & Rough’가 될 거라고 했다. 위대한 캠페인을 만드는 데 전력투구하기보다는, 시의성 있는 광고를 민첩하게 내놓을 거라는 의미였다. 무거운 한 방보다는 가벼운 잽으로 승부하겠다는 말이었다. <월간 윤종신>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월간 윤종신>은 2018년 8월에 100호를 발표했다. 윤종신이 날린 100 번째 잽이었다. Quick & Rough였다.
<월간 윤종신>은 가수 윤종신의 마지막 승부수였다. 자신의 취향을 좋아해 주는 사람들을 모았다. 성실하게 곡을 제안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꾸준히 문을 두드렸다. 무엇보다 이 모든 과정을 즐겼다. 이것이 윤종신식 집요함이었다. 공자가 논어에서 말한 그대로였다.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
2019년 6월, 윤종신은 2020년 한 해를 <월간 윤종신> 이방인 프로젝트NOMAD PROJECT에 쏟겠다는 깜짝 발표를 했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 그는 9월까지 모든 방송을 마무리하고 1년간 세계 일주를 떠날 예정이다. 2020년은 윤종신이 지천명이 되는 해이자, <월간 윤종신>이 10주년을 맞는 해다. 윤종신은 이해를 자축하면서 보내는 대신, 낯선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지내며 새로운 영감을 받으려 한다. 가수 윤종신의 새 출발이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앞으로 1년 동안 어떻게 지낼지 계획을 짜놓지 않았다고 했다. 첫 행선지만 아이슬란드로 정해놓았을 뿐 그다음에 어느 곳에서 작업할지는 미정이며, 유일하게 정해진 건 2020년 1년 동안 떠돌아다니면서 노래를 만든다는 것 하나뿐이라고 덧붙였다.
윤종신다웠다. 해외에 머무는 동안 확연히 달라진 음악을 선보이겠다거나, ‘좋니’와 같은 히트작을 내놓겠다 같은 ‘각오’는 없었다. 새로운 환경에서 꾸준히 곡을 발표하겠다는 것 외에는 ‘약속’도 하지 않았다. <월간 윤종신>을 처음 시작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힘을 뺀 모습이었다. 이방인 프로젝트를 하면서도 윤종신이 가진 본연의 경쟁력은 변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말고.
▶ 존재의 이유가 뚜렷하다
▶ 고유의 문화가 존재한다
▶ 차별화와 공감의 귀재다
▶ 강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 오직 고객과 시장만 바라본다
하루에도 수백개씩 쏟아지는 브랜드와 셀럽들의 대홍수 속에서도
자신만의 필살기로 업계 1등이 되고 시장의 판세를 바꾼 25개 초일류 브랜드에서 배운다!
- 『드디어 팔리기 시작했다』 읽어보기 > http://bit.ly/2kNg6B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