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의 문제다.
다른 사람들을 돌보느라
정작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관계를 읽는 시간>에서는 자신을 돌보지 않고 다른 사람을 돌보는 데 급급한 사람을 ‘돌봄형’이라고 부른다.
관계는 생각 이상으로 과거의 영향을 받는다. 이들의 공통점은 돌봄을 받아야 할 어린 시기에 누군가를 돌볼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라났다는 것이다.
명호의 사례를 살펴보자.
사업가였던 아버지는 명호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몰락했다. 그 뒤로 하는 일마다 잘 풀리지 않았다. 성격은 갈수록 괴팍해졌다. 교사인 어머니가 가계를 꾸려나갔지만 아버지는 기분 나쁜 일이 있을 때나, 심지어 아무 까닭 없이도 어머니에게 화를 내거나 욕을 해댔다. 의처증이었다. 그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얼굴은 늘 슬퍼 보였다. 어린 그에게는 말 못할 고통이었다. 두려웠다. 그 불안과 고통을 그나마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은 어머니의 기대에 있는 힘껏 부응하는 것뿐이었다. 불안에 대한 순응형의 대처가 순응이라면, 불안에 대한 돌봄형의 대처는 한발 더 나아간다. 상대를 보살피는 것이다. 다행히 그는 어머니의 기대에 맞게 공부를 잘했고, 동생들의 숙제까지 돌봐주는 의젓한 아들이었다. 그런 아들을 볼 때만큼은 어머니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흘렀다. “네 덕분에 엄마가 산다!”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그는 정말 날아갈 듯 기뻤다. 어머니를 기쁘게 하는 것이 그의 낙이었고 삶의 이유였다.
이 때문에 명호는 ‘나는 누군가를 잘 돌봐야 괜찮은 사람’이라는 자기 기준을 갖게 된다. 누군가를 돌보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고 위안을 받는 것이다.
돌봄형은 자아가 미분화되어 있어 누군가와 자꾸 융합하려고 한다. 자신이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보살펴줌으로써 하나가 되려고 한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연결감이 아니라 일체감이다.
이들은 스스로 기쁨을 만들 수 없고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야만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이들 또한 순응형처럼 자아가 미분화되어 있어서 자기 욕구를 잘 모른다. 겉으로 보이는 이타적 행동과 달리 이들의 내면에는 누군가를 돌봄으로써 칭찬받고자 하는 결핍된 아이가 있다.
이들의 바운더리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
첫째, 자신과 다른 사람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하는 혼란
둘째, 다른 사람의 삶과 문제에 대해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느끼는 과잉책임감
셋째, 자신을 외면하고 상대를 돌보는 타인중심적 관계방식
이들은 행복하고 유쾌한 이들에게는 관심이 없다. 불행한 이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훨씬 큰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 이들의 사랑은 늘 상처가 많거나 문제가 있는 사람들과 이루어진다. 이들은 그들을 정말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자신으로 인해 상대의 감정이나 삶이 달라지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상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한다. 결국 이들 역시 다른 사람을 조종하려는 사람들이다. 다만 그 조종이 노골적인 통제나 폭력적인 방식이 아니라 일방적인 돌봄이라는 은밀한 방식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상대는 이를 파악하기 어렵다.
돌봄형은 자신에게 돌봄을 받는 사람의 바운더리 역시 혼란에 빠뜨리고 만다. 돌봄형의 돌봄을 받는 사람들은 관계가 지속될수록 건강한 책임감을 가진 주체로 서지 못하고 자신의 책임까지도 상대에게 떠넘기고 마는 무책임한 모습으로 전락하기 쉽다.
돌봄형의 보살핌을 받는 이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이 건강한 사랑이 아니라 사랑으로 포장된 또 다른 통제임을 느낀다. 그러나 그 관계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중독자가 중독행위가 안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빠져나가기 힘든 것처럼, 이들은 점점 의존한다. 결국 파국에 도달하는 순간에 원망하고 절규한다.
“왜 그렇게 하셨어요!”
“그것이 진정 나를 위해서였어요?”
지금까지의 헌신과 노력, 자신의 존재 이유까지 송두리째 부정당하다니, 돌봄형에게 이보다 고통스러운 말도 없다. 그토록 사랑하고 헌신했는데 누구도 행복하지 못한 결과가 됐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다. 그러나 실제 상담실에서는 이런 경우가 넘쳐난다.
돌봄형인 사람이 만들어내는 공동의존 관계는 대한민국의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부모는 ‘아이를 위해서’라는 이유로 수많은 희생을 한다. 사실 부모라면 누구나 자녀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어쨌든 희생과 헌신이 아이들이 스스로 삶의 주체로 설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면 다행이지만, 부모에게서 벗어날 수 없게 하는 족쇄가 된다면 정말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부모라면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부모들의 헌신으로 지금 우리 아이들은 행복한가?
아니면 나중에라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우리 아이들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삶의 주체로서 성장하고 있는가? 만일 아니라는 대답이 떠오른다면 즉시 자녀와 자신의 바운더리를 살펴보고 조절해야 한다. 부모의 생각과 달리 아이의 삶을 좌우하는 것은 부모에게 달려 있지 않다. 질병이 치유되는 본질적인 힘은 약물이나 의술이 아니라 사람의 내적 치유력인 것과 같다. 의술이나 약물은 그 힘을 도울 뿐이다. 부모의 역할도 마찬가지다. 부모는 아이를 앞에서 끌고 가는 사람이 아니라 뒤에서 밀어주는 사람일 따름이다.
□ 참고도서
"내 맘 같지 않아도 괜찮아!"
저마다의 적당한 거리를 찾아내는 방법
『관계를 읽는 시간』, 문요한 지음, 더퀘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