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중학교 2학년 때였던 것 같다. 내가 Wall Street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 시점이. 무슨 영화를 보았던 것 같은데 사람들이 바삐 돌아다니고, 소리 지르고, 뭔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일들을 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금융권에 계셨던 영향도 있겠지만 결국 내가 월가에서의 커리어를 선택한 이유는 아버지도, 돈도, 명예도 아닌 순전히 호기심, 그리고 내가 그곳에서 해낼 수 있을까 싶은 일종의 이상한 도전 의식이었다.
대학원 시절, 나는 Wall Street에서 일하겠다고 결정한 내 목표를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고 오로지 그 목표만을 위해 달렸다. 아, 사실 월가에서 일하기 위해서 대학원을 갔다고 하는 것이 더 팩트에 가깝다. 그리고 졸업 후에 뉴욕의 J모 투자은행에서 3년간 일을 하고 2016년도 말에 업계를 은퇴(?) 했다. 업계를 나왔다는 얘기지 일을 은퇴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월가에서 3년 일하고 은퇴할 정도의 돈은 안 모인다)
참 많은 일들이 있었고 앞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시간이 좀 지난 현시점에서 내가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는지 객관적으로 평가해보고 싶다.
내가 얻은 것들
1. 기초 역량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면 최소한 1만 시간 정도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법칙이다. Associate 1년차에 나는 1년에 4,000 시간 정도를 일했다. 주당 78시간. 2년차, 3년차가 되면서 아주 조금씩 업무량이 줄어들었다고 해도 내가 회사에 바친 노력 (이라 쓰고 피, 땀, 눈물이라 읽는다), 그것은 총 1만 시간이다. 그리고 그 1만 시간 동안 꽤 복잡한 문제들을 풀었다. 무한대에 가까운 주가 동향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준비하는 기업의 인수 합병, 마켓이 본 적 없는 비즈니스 모델을 가진 회사의 IPO (기업공개), 미국의 각종 법률과 세법을 고려해야 하는 벨류에이션 등. 이런 일을 1만 시간 하다 보면 그 일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엄청난 기초 역량이 생기게 된다. 아무리 복잡한 문제여도 그것을 세분화해서 해결할 수 있는 자신감과 어느 정도의 기초 체력이 생긴다. 그리고 그것은 타 업계로 가더라도 나를 따라오는 "능력"이 된다.
해 질 녘 사무실에서 보이던 풍경. 해가 질 때쯤, 미팅이 모두 끝난 그때, 진짜 일이 시작된다.
2. 사람
식상하게 얘기하자면 동고동락 (이 업계의 경우 "고"가 "락"보다 월등히 쎄다) - 비슷한 일을 겪으면서 비슷한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성장해가는 회사 친구들을 만났다. 다 같이 밤을 새우다가 새벽 2시쯤 더 이상 못해먹겠다고 다 같이 위스키 바에 가서 시간을 맞춰놓고 30분 놀고 들어오기도 하고, 발렌타인데이에 밤을 새우다가 너무 배고파서 누군가 먹다 남은 빵 조각을 3명이서 하트 모양으로 만든 다음에 나누어 먹기도 하고, 여름날 뉴욕의 루프탑 바를 같이 탐방 다니기도 했다. 당연히 좋은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경쟁적인 조직에서 누가 내 편이고 누가 아닌지를 캐치하는 것도 중요한 기술이다.
팀과 함께 보러 간 U.S. Open
3. 조직에 대한 통찰력
월가 투자은행들의 조직 운영은 참 신기하다. 대부분의 애널리스트들은 2년차가 될 때에 사모펀드나 헤지펀드로 직장을 옮긴다. 그나마 associate들은 연령대가 조금 있다 보니, 회사를 오래 다닐 것이라는 기대를 위에서 한다. 여기에 더불어 조직의 헤드들은 철저히 영업 실적으로 평가를 받는다. 실적이 좋은 Managing Director는 모두가 함께 딜을 하고 싶어 한다. 아무리 사람이 쓰레기 같고 일을 어마 무시하게 시켜도 말이다. 업계 자체의 고질적인 이직률, 그리고 헤드들의 보상 체계 구조가 합쳐져서 어떤 경우에는 사람을 뽑는 데에만 관심 있고 있는 사람을 관리할 생각은 없는 조직이 되기 쉽다. 조금 연차가 있는 Associate이 되면서 내가 직접 사람을 뽑고 애널리스트 및 다른 어쏘들을 관리하는 입장이 되면서 어떻게 하면 나은 조직을 만들까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지금 내가 팀을 꾸려가면서 그때의 고민과 경험들이 도움이 많이 됐다.
가끔 업무 중에 머리를 식히러 온 브라이언트 파크
내가 잃은 것들
1. 인내심
남자 친구와 뉴욕의 어느 레스토랑에서 평범하게 저녁 식사 중이었다. 종업원이 주문을 연달아 실수를 했고 행동이 무척이나 느린 편이었다. 내가 주문한 스테이크가 미디엄 레어가 아닌 미디엄으로 나온 순간 나는 종업원을 불러서 엉망인 서비스에 대해서 조목조목 따졌다. 잘 따졌다고 할 줄 알았던 남자 친구는 꽤 정 떨어진 듯이 나를 바라보며, 어린 친구가 실수를 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까지 해야 했냐며, 요즘 왜 그렇게 주변 사람에게 무례하게 대하냐고 질타했다. 오랜만에 한국 친구들과 식사를 한 자리에서도 옆 테이블이 우리가 시끄럽다고 조용히 해달라고 얘기하는데 또 참지 못하고 큰 싸움을 만들었다. 이건 내가 아는 내가 아니었다. 문제는 내가 무례했다고 스스로 자각조차 못하고 있었다는 것에 있었다. 1분 1초가 중요하고, 실수가 용납되지 않고, 항상 공기 중의 무거운 압박감을 견뎌야 하는 생활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내 성격이 많이 바뀌어 있었다. 일이 내 마음대로 안 풀리면 화가 났고 짜증이 온몸으로 번져갔다.
심리적인 여유를 가져보고자 시작한 주말의 긴 산책들. 도움이 조금은 됐을까?
2. 사람
얻는 사람이 있다면 잃는 사람도 있었다. 그 시절, 시간은 없었고, 잠은 부족했고, 몸은 항상 피곤했다. 그러다 보니 중요한 친구들의 중요한 순간들을 많이 놓쳤다. 특히 한국에 있는 친구들의 결혼, 출산, 이직 등. 인생 중대 행사에는 내가 없었고 대화를 나누는 것도 쉽지 않았다. 가까운 사람이 아니면 나에 대한 이야기도 잘 꺼내지 않았다. 내가 하고 있는 일, 겪고 있는 일에 대해서 아무도 이해해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때는 그랬다.
우리 집 거실 풍경 - 이 뷰 때문에 집을 보고 3시간 안에 계약을 했다.
3. 건강
자세한 이야기를 할 것도 없이, 2015년 여름에 한국에 왔을 때 속성으로 건강 진단을 받았는데 의사가 미국은 산업 재해로 회사를 고소할 수 없냐고 물어봤다. 난 "하하 선생님도 참 - 재밌으시네요"라고 했는데 의사는 너무 진지했다. 이 정도로 해두겠다.
뒤늦게 고백하건대 건강은 회사의 직접적인 탓이라기보다 술 권하는 환경을 만든 탓이지 않을까 싶다.
Epilogue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에게 궁금해하는 질문은 "다 겪고도, 다 알고도 만약에 시간을 되돌린다면 다시 Wall Street으로 갈 거야?" 여기에 대한 내 대답은 YES이다. It was worth the ride. 하지만 그 대답에 내가 덧붙이는 답은 떠나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분명히 알았기 때문에 YES라는 것이다. 내 인생의 가장 치열했던 3년, 이제 놓아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