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히 잡담이 오가는 한 단톡방의 요즘 가장 뜨거운 화제는 A의 작업실 오픈이다. 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3년차 직장인이 된 A는 대뜸 용산에 작업실로 쓸 공간을 계약했다고 알렸다. 아무것도 없는 10평 남짓의 공간을 자잘한 수리부터 인테리어까지 다 해야 해서 분주해보였지만, 자신의 취향으로만 채운 공간을 빚어간다는 즐거움에 꽤나 신이 나 보였다. 단톡방의 멤버들도 곧 생길 자신들의(?) 아지트를 한껏 기대하며, 어떤 이름을 붙여줄지 시답잖은 의견들을 올려댔다. 완성을 앞두고 며칠 전 주민센터에서 사다리를 빌려야 하는데, 용산구 주민에게만 대여가 되는 모양인지 구경도 할 겸 와 보지 않겠냐고 연락이 왔다. 흔쾌히 그러겠노라 대답하고 약속한 시간에 주민센터에 들러 사다리를 빌린 다음 작업실을 찾았다. 지인들 중에는 첫 방문자였다. 한적한 주택가 안쪽에 찾아가는 재미가 있는 좁은 길로 들어가 파란색 논네온 조명으로 비춰진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넓다란 소파와 탁상을 은은한 간접조명이 비추고 있는 탁 트인 공간이 나왔다.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라며 누차 강조하던 A의 표정에 잊고 있던 무언가가 떠올라서 덩달아 들떠버리고 말았다.
대학에 들어가서 알게된 A와는 음악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친해졌다. 대학생이 되어 처음 맞은 여름방학, 일주일에 한 번 정기연습이 있었지만 다른 날이라고 딱히 달리 할 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개인 연습을 한답시고 매일 빈 강의실을 빌려 학교에 왔다. A 또한 그랬다. 다음 학기에 무대에 오를 곡을 같이 준비하기도 하고, 같이 밥도 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더랬다. 한 학기를 보내고 다음 방학에도 그랬다. 비슷한 시기에 입대가 정해져 동반입대를 하기로 했는데, '동반입대'라는 팀명으로 교내 가요제에 나가기도 했다. 그렇게 군대를 다녀와서 나는 워킹홀리데이를 떠났고, A는 음악을 좀 더 깊게 하다가 너무 깊이 들어간 나머지 음향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새로 공부하고 싶은 것이 생긴 A는 훌쩍 미국에 있는 대학교에 다시 입학했고,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취미삼아 몇 번의 무대에 올랐다가 취업을 하고 나서는 음악과 소원해지고 말았다. 그러고는 지금에 이르렀으니 팀 '동반입대'는 꽤 긴 공백기를 겪은 셈이다.
사다리를 빌려준 사례라며 점심을 쏜 A는 이번에 만든 작업실에서 여러가지를 해 볼 생각이지만, 우선 음악을 본격적으로 다시 할 거라고 말했다. 유학길에 오르기 전에 잠깐 시도했던 3인조 밴드를 재결성하는 것부터가 시작인 모양이다. 그리고는 내게도 슬슬 가사를 쓸 준비를 하라고 덧붙였다. 그러고보니 제대로 된 가사를 써낸게 언제였더라. 내 노래를 내 입으로 불러본 적도 까마득했다. A와 헤어지고 가는 길에, A가 만든 곡에 내가 가사를 붙여 불렀던 곡을 폴더 구석에서 찾아 오랜만에 들었다. '인생이라는 것은 언뜻 끌려가는 듯 보이지만 사실 흘러가는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라는, 당시에 하던 고민과 생각을 나름 녹여낸 노랫말이었다. 연습에 녹음에 공연까지 더하면 수 백번은 불렀을 후렴구가 괜히 생소하게 느껴졌다. 집에 와서는 오래된 가사집을 찾아 펼쳐봤다. 리듬과 멜로디가 전혀 기억이 안 나는 곡도 있었고, 반면에 언제 어디서 썼었는지까지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도 있었다. 가사 속에 담긴 당시의 나는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게 무엇인지 지금에 와서도 정확히 모르겠지만, 노래하고 싶은 무언가가 흘러 넘쳐 가사로 남은 것 같았다.
준비를 하라고 부추기는 바람에, 지금이라면 어떤 가사를 쓰게 될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보다, 무엇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는지를 먼저 고민하게 된다는 것이 그때와는 달라진 점일까. 모르는 것이 당연했던 때를 지나 모르면 아는 척이라도 해야하게 되어 버렸고, 알고 있지만 모른 척을 해야 하는 경우 또한 늘었다. 하고싶은 일보다 해야하는 일이 많아졌다. 무작정 어른이 되고 싶었던 어린 시절에는 어른으로 산다는 것이 이렇게 복잡한 일일줄은 몰랐다. 어른으로서의 일상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되고 나서는 어른이 되는 것을 늦추기 위해 가사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어른이란 되는 것이 아니라 되어버리는 것임을, 어른이 되어버리고 나서야 깨달았다.
A의 표정에서 보았던 '잊고 있던 무언가'는 어쩌면 어른이 되기 전에는 당연했던 무언가였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말 그대로 잊고 있었을 뿐인데, 영영 잃어버린 것처럼 굴지 않았나 괜히 되돌아보게 됐다. 어른이 되고 싶었던 때에도,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던 때에도, 어른이 되어버린 지금에도 변하지 않은 것들이 분명 있을텐데 말이다. 우선은 묵혀뒀던 노래들을 다시 불러보는 것 부터 시작해 볼까. 그 전에 녹음을 하려면 발성 호흡 연습부터 해야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다음주에 있을 작업실 오픈 축하 모임에 가져갈 선물을 골랐다. A의 얼굴에 묻어있던 것이 내게도 묻은 듯 했다.
2022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