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찰나
새해가 밝았다.
올해는 아이와 가정보육으로 함께하는 마지막 해가 아닐까 싶다.
아이가 일곱 살이 되는 내년에는 유치원에 보낼 생각이니 2021년을 끝으로 아이와의 한 몸 생활, 그 대단원이 막을 내린다.
이런저런 이유로 의미 있는 한 해의 시작이다. (사실 해가 바뀔 때마다 의미 있지 않는 해가 있었던가 –프로 의미러) 이제는 아이와 함께하는 일상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스러운 것이라 아이가 없이 어딘가에 홀로 있거나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이 영 어색하다. 외출해서 나와보니 신발을 안 신고 양말만 신은 상황의 느낌이랄까.
육아는 정말이지 ‘너무’ 행복한데 ‘너무’ 힘들다. 내 속에 있는지도 모르게 꼭꼭 숨어있던 거친 단어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올 것만 같은 순간들의 향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혼자였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어른스러움의 조각, 인내의 조각, 성실함의 조각,엄마가 되기 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낯선 웃음의 조각들을 찾아내며 조금은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일이 바로 육아다.
가정보육은 실은 나의 행복을 위한 선택이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육아가 너무 체질이라 힘들이지 않고 해 나가는 사람처럼 들리겠지만 결코 아니다.
살면서 엄마라는 단어를 입에서 뱉어 낼 일이 없었다. 그래서 일단 아이를 낳으면 엄마라는 단어를 남들보다 100배는 더 많이 입에서 뱉어내고 귀로 듣겠노라 다짐했다. 아이와 밀착하는 시간을 의도적으로 늘리고자 했던- 가정보육을 보상심리로 시작한 참으로 이기적인 엄마가 바로 나다.
사실 그대로 ‘ ‘엄마’라는 말을 많이 듣고 싶어서 아이랑 집에 있어요’ 하기에 좀 이상스럽고 엄마의 부재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 슬픈 번거로움을 생략하고 싶었다. 그래서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이유 대신 아주 보편적인 이유 ‘아이를 위해 가정보육을 선택했다’는 뉘앙스를 풍기며 가정보육을 했다. (실제로 시작하게 된 이유와는 다르게 아이와 지내면서 가정보육 예찬론자가 되었다.)
아이가 처음으로 엄마라고 불러준 그 날, 아이를 재우고 난 후 늦은 밤에 혼자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날의 일기장에는 엄마라는 한 단어가 북받치는 감정 속에서 각각 서로 다른 글씨체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눈물자욱과 함께 -
그 눈물자욱이 무색하게도 지금은 ‘엄마’ 좀 적당히 불러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내 모습에 깜짝 놀란다. 가져보지 못해 늘 미지로 남아있던 ‘엄마’라는 존재를 지나 이제는 ‘현실 엄마’가 되었다.
새해는 늘 그렇듯 다짐이라는 걸 한다. 보통 변하고 싶은 부분들에 대해 생각하곤 하는데 올해는 소크라테스가 ‘변화의 비결은 낡은 것과 싸우는 대신 새로운 것을 만드는 일에 모든 것을 쏟는 데 있다’라고 한 말을 기억해내면서 낡은 것을 일단 뇌 작동에서 밀어둔다.
그리고 생각을 하다가 단정한 글씨로 일기장에 꾹꾹 눌러,
‘아이를 따뜻하게 품는 언어, 원하는 나다움을 드러내는 언어를 꾸려나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적어 내었다.
생각은 언어로 나타나고 언어는 그 사람을 보여준다고 하니, 생각과 행동의 중간자 역할인 언어를 부드럽게 잘 다듬어 가고 싶다. 생각까지는 나에게 속해있고 말을 하는 순간 타인과의 연결이 시작되니 어쩌면 나는 타인과의 삶을 잘 꾸려나가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애정 하는 피터 레이놀즈의 그림책 단어 수집가에서는 단어를 수집하던 제롬은 뒤죽박죽이 된 낱말들을 모두 줄에 매달아 바라보며 이야기한다. ‘나란히 있으리라 상상도 안 해본 단어들.’ 그리고는 그 단어들로 시를 써서 노래를 만들어 모두를 감동시킨다.
나의 언어들이 제롬의 단어들처럼 모두를 감동시킬 수는 없을 거다. 하지만 내가 뱉어낸 언어들이 사랑의 아우라를 풍기며 타인의 마음에 안착하고, 미처 들어가지 못했더라도 주변을 맴돌며 공기를 따뜻하게 데우는 역할을 하기를 바라본다.
‘ 무엇인가 시작하기 좋은 오늘. 우리의 날들이 좋은 시작으로 채워지길 바라면서
Happy new year!’
P.S 그림은 작년 새해 다섯 살이 된 테리지노가 말을 보고 싶다고 해서 급하게 달려간 곳이다. 올해는 그 어디로도 달려갈 수 없지만……
내년 새해에는 우리 모두 원하는 곳 어디든 달려갈 수 있기를 온 마음으로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