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이아사우라 May 31. 2021

엘레베이터에서 1

테리지노가 사는 집


우리 아파트 공동현관의 센서는 느긋하고 서두름이 없다. 매우 빠르게 비밀번호를 따다다다다딱 눌러도 보란 듯이 아주 우아한 속도로 문을 열어준다. 

익숙해질 법도 한 그 속도가 여전히 답답한 것은 빠르고 편리한 생활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빠르게 들어가는 방법은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닫히기 전에 그 뒤를 후다닥 뛰어 들어가는 것인데 센서의 우아함을 닮지 못한 나는 뛰어 들어가기를 좋아하는 서른 후반의 여자다. 


그날도 역시나 공동현관이 열린 모습을 보고 멀리서부터 뛰었다(보통 이유 없이 뛰는 날이 많지만, 그날은 꼭 뛰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애석하게도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했는데 문이 닫혀버렸다. 뛰는 속도를 줄이는데 문 안쪽에서 열살 남짓의 아이가 나를 돌아보더니 갔던 길을 다시 거슬러 돌아와 그 우아한 센서에 신호를 보내주자 문이 열렸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 같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그 앞에는 의기양양하게 물총을 옆구리에 찬 두 명의 친구들이 나에게 문을 열어준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삼총사가 생각났다. 내게 달려온 아이는 달타냥!)

"정말 고마워 아줌마가 급한 일이 있었는데 덕분에 빨리 들어왔어."

"괜찮아요. 급해 보이셔서 열어드렸어요."

(다른 이의 급함을 돌아보는 어린이라니.…)

"실례가 안 되면 몇 살인지 물어봐도 될까?"

"열 살이에요"

"아줌마가 올해 들어서 제일 멋진 마음을 열 살 학생에게 받았네! 정말 고마워요."

우리의 대화에 물총을 멋지게 매고 있던 친구 한 명이 불쑥 대화에 끼어든다. 

"아.. 얘가 얼굴도 멋지고 가끔 멋진 일도 하는데 … 학교에서는.. "

어린이다운 솔직한 질투가 시작될 기미가 보이기에 나 역시 끼어들어 버리고 말았다. 

"역시 멋진 친구 옆에는 멋진 친구들이 있었네. 너희들이 있어서 대한민국이 든든하다."

때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멋진 초등학생들의 황송한 힘찬 인사를 받으며 센서의 우아함을 닮고자 나비처럼 팔랑거리며 내렸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연신 고개를 떨구며 인사를 하던 어린이들을 보며 생각했다.

‘어린이들의 마음은 어디까지 뻗어갈 수 있는 걸까?’

‘분명 멋진 어른으로 자라겠지….?’




아들을 키우고 있어서인지 중 고등학생 정도의 남자아이들을 보면 아이의 미래를 상상하는 묘한 취미가 생겨버렸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소년들의 세계를 상상해 볼 줄은 몰랐지만 그 상상의 시간은 생각보다 달큼하다. 삼총사를 떠올렸던 물총을 맨 세 명의 남자 어린이들을 만난 그날도 아이의 몇 년 후를 상상했었다. 


아이에게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어린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가끔 아이가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청년이 되고 아빠가 되는 그런 날들을 상상해본다고 이야기했다.

갑자기 울상이 된 아이는 품에 파고들며 어리광 섞인 목소리로

"엄마 그래도 나는 늘 엄마의 아기야? 그리고 나는 엄마가 할머니 되는 건 싫어 엄마는 지금이 제일 좋아. 맨날 똑같이 있어."

아이의 천진한 말에 당연한 시간의 흐름, 이치에 대해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아직은 엄마라는 세계가 가득한 그 마음에 힘껏 응답하며 불안함을 잠재운다. 

"엄마는 언제나 이렇게 있을게."


어쩌면 아이는 나이 듦에 대해서 명확한 정의는 할 수 없겠지만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물어 가는 것과 시들어 가는 것의 차이를.. (신체의 노화만을 놓고 생각하자면…) 아이는 날마다 점점 여물어 가고 나는 조금씩 시들어 간다.  

어느 책인지 기억나진 않지만 아이를 키우며 시들어 간다는 말과 의미를 나란히 하는 엄마의 청춘을 갉아 먹으며 자랐다는 구절을 기억한다. 기억하는 이유는 그 대목을 읽으면서 울다가 책을 덮어 버렸기 때문이다. 할머니 손에서 자란 나는 할머니의 청춘도 모자라 노년까지 갉아 먹은 건가? 하는 생각에 한동안 힘들었다. 아이를 낳기 전에 일이기 때문에 나는 그 구절을 그냥 받아들여 버렸다. 빗댈 경험이 없으니 의심 없이-


그러나 엄마가 되어 있는 지금 그 책을 읽었다면 웃어넘길 수 있을 것 같다. 

반은 동의하고 반은 동의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동의하지 않은 절반은 나에게서 왔는데 아이를 기르면서 아이가 나를 갉아먹는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피로하고 아이를 낳기 전의 삶이 그리울 때가 있지만 그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찾아오는 만족을 모르는 상황 혹은 감사가 되지 않는 순간들로 인해 기인하기 때문이다. 

도리어 아이는 나를 새롭게 태어나게 해주었고 살려주었다.

나만 알던 내가 몸 밖으로 떨어져 나온 다른 하나의 심장을 돌보며 다른 이들에게 마음을 내어줄 줄 알게 되었고, 내가 사는 공간만이 중요했던 내가 내 발끝이 닿지 않았던 저 먼 땅끝을 넘어 망망대해까지 생각하며 삶의 태도를 바꾸어 간다. 

그저 살던 내가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다…..


동의하는 절반은 사람은 다르다는 생각에서 왔다. 

그 누군가는 엄마로서의 삶이 너무나 버겁지만, 그 책에 표현처럼 자신을 갉아내며 까지 아이를 길러내고 있을 수도 있겠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어린이의 친절함은 아이의 미래를 상상하게 해주었고, 아이는 엄마의 미래를 상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었다. 

더 나아가 나의 오래 묵은 기억까지 되살려 그 당시의 울음을 웃어넘길 기회까지 쥐여주었다. 

그러니까 정말이지……

어린이들의 마음은 어디까지 뻗어갈 수 있는 걸까?



(그런 어린들이 귀하고 귀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오류없는 발신을 꿈꾸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