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변한다

by 다람

스스로 본인을 '불행한 군인'으로 자처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국가와 민족은 영원하다"라는 말을 남겼다.



국가와 민족은 영원할까?



SBS 뉴스의 주장만을 따르면 지구의 수명은 최대 75억 년이다. 태양계의 수명은 100억 년 남짓 정도 된다.

그때까지 국가와 민족은 영원할까? 박 대통령은 결코 바보가 아니므로 그것을 몰랐을 리가 없다.



하다 못해 조선 왕조도 600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멸망했다. 국가와 민족은 영원하다는 표현은 믿음이 아니라 한낱 희망 사항에 불과하다.



대한민국은 영원할까? 2~300년 뒤, 아니 당장 100년 뒤에도 존재할까? 알 수 없다.



전 세계를 미국과 함께 양분했던 최강대국 소비에트는 한 세기는 커녕 겨우 70년을 버텼다.



거대한 제국 소련이 멸망할 지 그 어느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영원히 강고할 것만 같았던 베를린 장벽과 동독이 무너질지 누가 알았겠는가? 이에 따르자면 '세계의 경찰' 미국의 미래도 결코 장담할 수 없다.

내 기억을 돌려보면 할아버지는 나라를 믿지 못하셨다. 정확히 말하자면 언제든 이 나라가 허망하게 사라질 수도 있다고 여긴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할아버지의 국적은 다섯 번이 바뀌었다. 그는 이민족이 통치하던 일본 제국령 한반도에서 출생했다.



19세 되던 해 조국이 해방되고 미 군정기를 거쳤다. 그로부터 3년 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다시 2년 뒤 한국전쟁이 터지며 한반도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되어 버렸다.

UN군과 인민군이 엎치락 뒤치락하더니 국군이 영토를 재수복하며 다시 대한민국이 되었다.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해도 나라가 다섯 번이 바뀐 것이다. 이런 판국이니 또 언제 바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유신 정권 시절 단행한 화폐 개혁은 국가에 대한 불신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이제는 은행조차 믿지 못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꾸깃꾸깃한 지폐를 장판 속에 숨기곤 했다.



반면 할머니는 이 나라가 나름 오래 존속하리라고 보셨다. 죽어라 일해 모은 돈으로 한강 이남 뽕밭을 사려 했다.



놀랍게도 그곳은 다름아닌 지금의 '강남'이다. 그녀의 선구안은 정확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언제든 '저노무 김일성 개자식'이 다시 남침을 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북괴가 남침하면 놈들의 마수가 뻗치지 않는 안전한 땅으로 언제든 피신해야하니 한반도 아랫 지방에 땅을 사두었다.



그 시절엔 가장이 모든 것을 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할머니의 의견은 묵살당했다.



훗날 우리는 결론을 알고 있다. 김일성은 죽는 순간까지 다시는 남침을 하지 못했고 그저 똥값 수준의 누에나 치던 뽕밭은 오늘날 상전벽해의 강남이 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할머니는 맞았고 할아버지는 틀렸다. 어릴 때는 할아버지의 오판을 원망했지만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내가 할아버지라도 그렇게 판단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평생 국가와 체제가 무너지는 경험만 했다.



무엇 하나 안정되거나 믿을 수 없는, 언제나 위정자의 한 마디에 정책이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시대를 겪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것이다.



그런 시대에 도대체 무엇을 믿을 수 있었을까?



나 역시 감히 할아버지의 대혼란 시절에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열두 살 때 터졌던 IMF 사태가 그것이다. 나는 그 시절을 아주 똑똑히 기억한다. 초등학교 5학년생이 멍청하게 가방을 메고 하염없이 기다리던 버스 정류장 인근 구멍 가게 가판대에 걸려 있던 신문에는 그날의 1달러당 환율이 대문짝만하게 매일 1면을 장식했다.

미친년 달밤에 널뛰듯 제정신이 아니었던 환율이 아직까지 뇌리에 남아 있다. 철옹성처럼 여겼던 대기업들이 떼지어 추풍낙엽처럼 맥없이 증발했던 사건은 말해 봐야 잔소리다.



그 어느 것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경험했다.



뜬금없이 대한민국의 멸망을 지껄이는 내 이야기가 마치 동양 고전 <열자>에 등장하는, 하늘이 무너질까 걱정했다던 기나라 사람의 개소리 수준으로 여길지 모르겠다.



그러나 붓다의 제행무상처럼 반드시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다.



수백년을 지탱하든 천년 왕국이 되든 분명 언젠가는 이 나라와 민족도 역사 속으로 까맣게 사라지고 말 것이다.



아주 먼 미래의 역사가 기억하는 오늘의 대한민국은 어떨까? 그리고 이 땅에서 숨쉬며 살았던 나와 같은 이름 없는 민중들은 어떻게 기억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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