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를 넘어 장미 너머로 왔다. 장미가시가 박혀있다. 가시에 스친 것인지 잎에 스친 것인지 장미에 스친 것인지 모르겠다. 가시가 없는 자리엔 지는 햇살처럼 상처가 남았다. 바람이 불어와 풀냄새를 가져왔다. 얼마나 장미를 넘어 왔을까?
뒤를 돌아볼 마음이 없다. 그토록 기다리던 장미 너머의 세상으로 넘어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제 상처가 보고 싶지 않다. 다만 고개를 들어본다. 더 이상 넘어갈 장미가 보이지 않는다. 바람이 불어와 풀냄새가 난다.
따갑다. 계속 따갑다. 바람에 흔들린 장미가 등을 때린다. 가시가 등에 박혀 빠지지 않는다. 앞에 장미가 보이지 않아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다.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고개를 떨군채 조금씩 왼쪽 어깨 너머를 바라본다. 왼팔과 갈비뼈 사이의 공간에서 바람이 느껴진다. 그 사이의 공간을 넓혀본다. 다시 장미가 보인다. 꽃이다. 어디가 장미 너머일까?
#0.2
내가 바라보았던 것은 장미가 아니었나보다. 처음부터 장미에게 얼굴은 없었다. 아니 어디가 얼굴인지는 장미만 정할 수 있는 것이었다. 무엇이 장미의 얼굴이었을까? 나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모르겠다.
살에 박힌 장미가시가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살갗이 벗어진 자리에 흐르는 피를 덮은 잎사귀가 흔들린다. 바람이 불어와 잎사귀를 더욱 흔든다. 흔들리는 잎사귀는 장미의 것일까? 오늘 나의 것이 되었을까? 여전히 모르겠다.
며칠 전 까치와 까마귀가 종달새처럼 날았다. 두 손과 날개를 몸에 붙인채 하늘을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까치와 까마귀 아래로 지는 태양의 빛 줄기 하나 새어들지 않았다. 장미도 보이지 않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 소리만 들려왔다. 그 소리를 따라왔다.
그 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그리고 장미가 점점 크게 보인다. 붉은 장미꽃이다. 장미는 원래 그 자리에 있었다. 꽃을 장미의 얼굴이라고 오랬동안 생각해왔다. 나의 얼굴은 이쪽이 아니야..
#0.3
그럼 어디가 너의 얼굴이니? 나는 얼굴이 무엇인지 몰라.. 그러니까 얼굴은... ... ... ...... 나도 모르겠다. 입에 담긴 말이 멈춰섰다. 종달새가 온몸으로 바람을 오르내린다.
처음부터 얼굴만을 바라보며 살아왔다. 눈 앞에 보이는 모든 것은 얼굴이 있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얼굴이 땅에서 점점 멀어졌지만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보다 땅에 가까이 있는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땅에서 멀어지는 얼굴이 자꾸만 눈을 채웠다. 그것들은 얼굴이 아니었다.
장미에게도 얼굴이 있다고 생각했다. 꽃잎이 얼굴을 동그랗게 두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장미의 꽃송이가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장미의 얼굴은 알지 못했다. 다른 장미의 얼굴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장미의 얼굴이 없다는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지금 내가 도착한 곳은 장미 너머가 아니었다. 그럼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할까? 따갑다. 점점 장미의 가시가 살을 파고 들어온다. 움직여본다. 발길질만 하는 것 같다. 발이 땅에 닿지 않는다.
#0.4
다시 묻는다. 나는 이제 무엇을 할수있나? 고개를 움직여본다. 팔과 몸통 사이로 바람이 움직인다. 바람 사이로 하얀 별빛이 보인다. 가시가 찌른다. 하얀 별빛마저 사라졌다.
나비였을까? 민들레였을까? 바위였을까? 다시 고개를 움직여도 보이지 않는다. 다시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이 눈썹부터 턱으로 내려온다.
다시 그 바람을 기다려본다. 눈이 따갑다. 새들의 소리와 바람의 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더 이상 내가 있는 곳까지 오지 않는다. 나는 그곳으로 갈 수 없다. 햇살이 눈을 찌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