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에 갇힌 곰

삶의 위협

by 진언

150페이지 분량의 평가보고서 두 권을 제출하기 52일 전, 업무 파트너가 출산휴가에 들어갔다. 출산 예정일을 40일 앞둔 시점이었다. A는 기관의 이름으로 제출해야 할 보고서를 홀로 작성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A는 상위 상사에게 지원인력을 요청했다. 그러나 단칼에 거절당했다. 그는 혼자서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녹록하지 않은 상황을 충분히 공감하지만, 그럼에도 예년과 같은 결과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기관의 성적표엔 2등이 찍혀 있었다. 당시 전임 담당자들은 3개월의 시간을 보고서 작성에 할애했다. 직속 상사는 걱정하는 A에게 희망을 가지라고 말했다. A, 당신이라면 쓸 수 있다고 말했다. 본인도 끝까지 돕겠다고 했다.


그렇게 한 달이 시작되었다. 직속 상사는 A에게 재택을 권했다. 행여 출퇴근길 눈길에 사고라도 날까 불안하다고 했다. 대신 조건이 있었다. 출근을 준비하고 이동하는 시간도 아껴 보고서 작성에 임해주기를 간곡히 요청했다. 동시에 주 7일 근무를 부탁했다. 그는 한 달이 길지 않은 시간임을 강조했다.


A는 재택 첫날 7시부터 재택시스템에 들어갔다. 결국은 본인이 해내야 할 일이었다. 밤 11시가 넘도록 A는 책상 곁을 떠나지 못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휴일에도 A의 책상은 각종 서류들로 번잡했다. 양 손목엔 검은색 보호대가 둘러 있었다. 삐꺽 대던 몸과 달리, 보고서는 조금씩 정해진 분량에 다다랐다. A는 내심 자신을 돕겠다던 직속 상사의 전화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퇴근 시간이 지나면 바로 메신저를 꺼버렸다. 그 어느 상사도 보고서의 진행 상황을 묻지 않았다.


A는 동굴에 갇힌 곰이었다. 동굴 밖에는 시한폭탄이 무시무시한 형체를 뽐내며 서 있었다. 째깍째깍,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그 시각 폭탄 앞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곰이 빨리 나오기를 바랐지만, 어느 하나 동굴 속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곰이 무언가를 들고 나오지 않는 한, 곰은 의미가 없었다.


그렇게 20일이 지났다. A는 가까스로 150페이지가량의 초안을 완성했다. 순진한 A는 순간 뿌듯함의 눈물을 흘렸다. 드디어 끝까지 돕겠다던 상사가 나타났다. 그는 보고서 제출 후 일정을 읊으며, 고지가 아직도 멀었음을 상기시켰다. A는 다시 동굴 속 곰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 상사가 바뀌었다. 새로운 상사는 A의 말에 친절히 귀 기울여 주었다. 그러나 그 역시 A의 건강을 간곡히 빌었다. 보고서 제출 전까지 A는 절대 아프면 안 되는 존재인 듯했다. 그리곤 늘 이 말을 덧붙였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보자고. 하지만 새로운 상사 역시 퇴근 시간이 지나면 쏜살같이 사라졌다. 그러던 어느 날, A는 텅 빈 메신저 창을 바라보다 심한 두통을 느꼈다. 결국 재택시스템을 빠져나와 컴퓨터 전원을 꺼버렸다.


갑자기 시작된 두통이 A를 놔주지 않았다. 타이레놀 두 알을 털어 넣었지만, 여전히 머릿속 지진은 멈추지 않았다. A는 불현듯 내일 아침 눈을 뜨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어디든 글을 남겨야 했다. 결국 A는 오랜만에 브런치스토리 앱을 클릭했다. 그리곤 두서없이 글을 남기기 시작했다. 어느 곰의 이야기가 내일도 지속되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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