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위해선 신이 되어야 한다. 같은 잉크 점박이 녀석들 사이에서 생물과 무생물 역할을 정하고 물체의 위치와 시간대 그리고 인물의 모든 행동을 직접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2차원 인형극을 한다는 기분으로 그림을 그리다 보면 어느새 내가 캐릭터를 진실로 아끼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 부모의 책임감을 살짝 맛볼 수 있었다. 사랑이 애틋한 감정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내가 아끼는 것을 온전한 형태로 이해하기 위해 치밀한 계산과 계획을 마련해야 하는 과정임을 깨닫게 되었다.
캐릭터는 자신이 걷고 자고 먹고 숨 쉬는 행동들에 초당 최소 24장의 그림이나 소모된다는 사실을 알 턱이 없다. 그러나 난 그 노동이 가성비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 캐릭터의 움직임을 나타낸 각 24장의 그림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다른 캐릭터라고 믿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런 존재일까 싶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나는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더 나아가 매 순간 나는 다른 사람이 되기 때문에 절대적인 자아는 결국 신처럼 매우 고등한 존재일 것이다. 나를 잘 믿는 것은 신을 믿는 것처럼 신앙적인 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4장의 그림을 반복적으로 재생하면 그림 속의 인물은 같은 행위를 반복할 것이다. 그렇게 가상인물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된다. 같은 행동을 반복하게 되는 시간에 갇히는 것을 불행이라고 볼 수 도 있겠지만 감정과 생각 또한 같은 시간에 갇히게 되기 때문에 당사자는 그 사실을 모를 것이다. 게다가 가상인물은 시간의 흐름을 감지할 수 없다. 완벽한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주고 영원히 반복되는 순간을 인물에게 만들어준다면 그 인물은 같은 상황을 두고 늘 새롭고 기쁘게 맞이할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캐릭터의 한 동작을 구성하는 그림들이 같은 모습을 한 각기 다른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 결국 캐릭터의 감정은 여러 명의 몫으로 수십 번은 쪼개진다고 본다.
시간은 참 신기하다. 우주는 모든 방향으로 완전한 차원인 것 같지만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간은 우주의 완전체에 비해 낮은 차원으로 느껴진다. 아주 높은 차원의 시간대에서 내 인생을 바라본다면 반복 재생되는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처럼 내 모습들이 각 순간들마다 갇혀서 반복되고 있는 중이 아닐까 하는 섬뜩한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내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도달할 것임은 틀림없다. 인생이 언젠가 끝난다는 것은 현재의 내가 내 삶의 일부가 아니라 모든 시간대를 누리는 주인임을 말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