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정권을 바라보는 일본 언론의 그라데이션

世音小評 (2025. 6. 11)

by 완서담필

들어가며


주요 신문사의 사설은, 그 사회의 기대와 불안을 각기 다른 결로 비춘다. 일본도 예외는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을 계기로 치러진 2025년 6월 대선에서 이재명 후보(이하 경칭 생략)가 승리하자, 일본의 주요 일간지들은 일제히 사설을 통해 새 정권을 바라보는 시선을 내비쳤다.


이른바 합리적 진보의 결을 지닌 아사히신문. 그보다는 좀 더 중도에 가까운 마이니치신문. 전통적 보수의 목소리를 자부하는 요미우리신문과, 강성 보수, 극우적 입장도 마다하지 않는 산케이신문. 서로 다른 결을 지닌 이 네 신문의 사설은, 패치워크처럼 교차하며 맞물릴 때 오히려 또렷해지는 하나의 풍경을 그린다. 그 교차하는 결들 사이로, 일본이라는 복합적 실체가 천천히 드러난다.


이렇게 교차하는 시선들은, 각기 다른 각도로 이재명 정권을 비춘다. 그 시선의 결은 일본이라는 하나의 이름 안에 중첩된 인식의 층위를 드러내고, 동시에 우리가 일본을 어떻게 다시 읽어야 하는지를 되묻는다.


역사 문제라는 프레임을 잠시 걷어내면, 일본의 주요 신문사들이 비춘 이재명 정권의 상은 한국 안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경계선을 밝혀주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일본’을 단일한 주체로 상정해온 시선의 착시를 걷어내는 순간, 우리는 일본이라는 복수형 명사의 풍경과 마주하게 된다. 그것이, 일본이다.


아사히신문 – 문법의 전환에 주목하는 리버럴 시선


“깊게 뿌리내린 분열을 치유하고, 화합을 이끄는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경제 구조를 바꾸고 부의 편중을 시정하는 것은 많은 국민이 열망하는 일이다.”

“이 후보는 한미동맹을 기초로 일·미·한 협력도 중시하면서, 북한과의 긴장 완화도 추진하겠다고 밝혔지만, 그 외교적 역량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올해는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이다… 양국 정상이 조기에 소통을 심화해 나가길 기대한다.”


2025년 6월 5일 자 아사히신문 사설은 이번 대선을 ‘권력의 폭주를 눈앞에서 본 국민의 분노’가 만들어낸 결과로 읽는다. ‘내란 심판’이라는 구호가 유권자의 정서에 호소한 점에 주목하며, 이번 정권 교체를 단순한 정치적 승패가 아니라 사회적 치유를 향한 열망으로 해석한다. 한편, “공정하고 기회가 널리 열려 있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당선자의 선언은, 기대라기보다 물음표에 가깝게 응시된다. 그것이 말의 선언을 넘어 정치의 문법으로 바뀔 수 있을지를, 조심스럽게 지켜보겠다는 입장이다.


아사히는 이 대통령이 밝힌 한미일 협력 의지에는 조심스럽게 긍정의 뉘앙스를 얹으면서도, “외교적 역량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는 표현으로 일정한 거리를 둔다. 북한과의 긴장 완화 역시, 환영보다는 관망의 시선으로 감싸 안는다. 국교정상화 60주년이라는 상징적 해를 언급하며, 양국 정상이 조기에 소통을 심화하길 바란다는 기대감을 분명히 드러내면서도, 아사히는 한국의 새 대통령이 말하는 공정, 통합, 실용이라는 새로운 정치 언어가 실제 구조로 안착하길 조용히 기다린다. 그 문법이, 이번에는 정말로 바뀔 수 있을지를 지켜보겠다는 듯이.


마이니치신문 – 예리한 현실 진단과 절제된 낙관


“반년 가까이 이어졌던 정치적 공백에 마침내 마침표가 찍혔다.”

“수적 우세를 앞세워 반대 의견을 억누르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

“전략물자 공급망의 구축에도 협력이 가능하다… 한일 관계를 다시 악화시켜서는 안 된다.”


2025년 6월 4일 자 마이니치신문 사설은, 오랜 혼란 끝에 한국 정치가 마침내 하나의 고비를 넘겼다고 진단한다. 그러나 그 마침표 위에 섣부른 낙관은 얹지 않는다. 여당이 국회 과반을 점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하며, 수적 우위가 이견을 억누르는 권력의 도구로 전락하지 않기를, 조심스레 충고한다. 환영보다 긴장에 가까운 시선, 그 안에 정치의 속성에 대한 냉정한 인식이 깃들어 있다.


대외 정세에 대해서도 신중한 톤은 유지된다. 경제 위기, 미·중 갈등, 북·러 연대 같은 구조적 위기를 거론하며, 이재명 정부의 외교력이 시험대에 오를 것임을 예고한다. 정책 결정의 자율성이 외부 변수에 의해 제약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 그 안에서의 유연한 대응을 주문하는 것이다.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전략물자 공급망 협력”이라는 실익 중심 키워드를 꺼내 들며, 신뢰 회복의 여지를 탐색한다.


특히, “이시바 시게루 총리는 조속히 정상회담을 실현하고 신뢰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문장은, 한국을 향한 주문이기보다 일본 정치에 던지는 냉철하면서도 단호한 질문이다. 상대국의 정권 교체를 말하면서, 동시에 자국의 정치를 성찰하는 언어. 마이니치의 낙관은 늘 절제 속에서 고개를 든다.


요미우리신문 – 실용은 인정하되, 신뢰는 유보


“한미일을 비롯한 다국간 협력이 제대로 기능하려면, 한일 간의 안정적 관계와 협력이 필수적이다.”

“대북 유화정책은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다시 강경한 대일 노선으로 돌아갈 수 있다.”


2025년 6월 5일 자 요미우리신문 사설은, 이 대통령이 밝힌 한미일 협력 강화 의지를 “현실을 반영한 정책”이라 평가한다. 그것이 실용적 접근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 지속 가능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물음표를 남긴다. “형사 재판을 안고 있는 이례적인 대통령”이라는 표현에는, 이재명 식 실용주의가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는 미심쩍은 시선이 느껴진다.


요미우리는 북한이 한국을 새삼스럽게 “적국”으로 규정한 상황을 들며, 대화와 협력을 강조하는 이재명의 기조는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일축한다. 윤석열 정부가 추진했던 강제징용 해법을 긍정적으로 회고하면서, 이에 대한 이 대통령의 비판이 다시금 외교 노선을 흔들 수 있다는 우려도 덧붙인다. 실용이라는 외피는 인정하지만, 그것이 내부 정치의 파도에 따라 쉽게 뒤집힐 수 있다는 점에서, 신뢰는 유보된다.


요미우리는, 한국의 새 대통령이 내건 ‘실용’이라는 말이 과연 하나의 기조로 지속될 수 있을지를 조심스럽게 가늠하며,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이재명 정권을 바라보고 있다. 그 거리감은, 당분간은 쉽게 좁혀지지 않을 것이다.


산케이신문 – 조건부터 꺼내드는 불신의 시선


“위안부 문제를 다시 꺼내려는 의도가 읽힌다.”

“한일 관계는 문재인 정권 시절로 회귀하게 된다.”

“한미동맹은 무너질 것이다.”

“한국의 안보는 일본과의 안보 협력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2025년 6월 5일 자 산케이신문 사설은, 위안부 문제의 유네스코 등재 추진과 새로운 재단 설립 등을 언급한 이재명 후보의 과거 공약을 상기시키며, 그것이 2015년 한일 합의에 반한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새 정권이 그러한 조치를 실제로 추진할 경우, 일본과의 관계는 문재인 정권 시절의 ‘전후 최악’으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단언한다. 여기에 이재명의 미군 철수 관련 발언, 대만 유사 사태에 대한 소극적 태도 등을 덧붙이며, 불신의 조각들을 하나씩 맞춰간다.


특히 “한국의 안보는 일본과의 협력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표현은, 신뢰를 위한 전제라기보다는 ‘한국은 일본 없이는 안 된다’는 복선을 깔고 있는 듯이 읽힌다. 동맹 수준의 밀착이 아니라면 대화조차 성립되지 않는다는 듯한 시선 속에서, 한국은 오직 시험받는 존재로 그려진다. 사설의 논조는 단호하고 일관되며, 그 안에 어떤 관망이나 기대의 여지도 없다. 산케이는 한국의 새 정권이 과거 문재인 정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고 있으며, 별다른 기대도, 기대할 이유도 지금으로서는 없어 보인다.


불신의 결, 기대의 틈


네 신문 모두, 외교‧안보 국면에서 이재명 정권의 태도에 주목하고 있다. 정도의 차는 있으나, 그 시선 아래에는 공통적으로 불신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아사히와 마이니치는 조건부 기대 속에서 실용 외교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요미우리는 정중한 유보를, 산케이는 협력 자체를 거부하는 듯한 단절의 어조를 보인다.


그럼에도 아사히와 마이니치는 ‘한미일 협력’과 ‘실용’이라는 언어에 조심스럽게 공명하며, 신중한 응원의 시선을 건넨다. 아사히는 국교정상화 60주년이라는 상징을, 마이니치는 전략물자 협력의 실익을, 요미우리는 기존 합의의 존중을, 산케이는 군사 공조의 강도를 신뢰의 기준으로 삼는다.


이처럼 얽히고 교차하는 시선 속에서, 한일 관계는 과거를 넘어 새로운 구성을 요구받고 있다. 안보, 경제, 정서가 뒤엉킨 복합적 지형 위에서, 우리는 관계의 미래를 다시 설계해야 한다. 그리고 일본 역시, 그 지형 안에서 우리를 다시 바라보고 있다.


대일 외교의 조건 – 고정된 프레임에서 벗어날 때


이상에서 살펴본 사설 너머로 어른거리는 건, 일본이라는 실체다. 그러나 그 일본은 결코 단세포로 된, 단선적이고 단순한 구조의 나라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재명 정부의 대일 외교 역시 단세포적이고 단선적이며 단순한 외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감정과 기억의 구조 자체를 다시 짜는 작업이어야 한다. 일본 내부의 그라데이션을 직시할 때에야, 새로운 외교의 문법은 비로소 현실을 움직이는 설득력 있는 말이 될 수 있다.


“나쁜 일본! 그 인간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우리 알 바 아니다.” 이 말은, 분명 많은 한국인의 감정을 솔직하게 대변하는 목소리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일본’을 하나의 의지, 하나의 목소리로 단순화하는 순간, 우리는 다시 '나쁜 일본'과 '착하고 억울한 우리'라는, 오래된 이항대립의 감정 구조 속에 스스로를 가두게 된다. 일본은 아사히와 마이니치의 일본만도 아니고, 요미우리와 산케이의 일본만도 아니다. 그 안에는 서로 다른 목소리가 있고, 결이 다르며, 균열과 토론이 공존하는 사회가 있다.


나가며


우리가 그렇듯, 일본 역시 복수의 얼굴을 지닌 나라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그 다면성 앞에서 주저하거나, 애써 외면해왔다. 일본이라는 단어에 얽힌 감정과 기억, 오래된 프레임은 때로 그 현실의 결을 가린다. 전후, 민주주의 국가로 변화한 일본조차 여전히 군국주의의 잔상으로 덧칠되곤 한다. 그렇게 반복되는 인식의 틀이, 오늘의 외교를 막고 있는지도 모른다.


새 정부에 바란다. 지금은 또다시 ‘죽창가’를 부를 때가 아니다. 세계도, 일본도, 우리도 이미 달라졌고, 낡은 프레임에 기대 사태를 해석하는 방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필요한 것은, 그 변화를 직시하고 사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이다. 대일 외교는 그 인식의 전환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는 종종, 일본을 하나의 의지, 하나의 논리, 하나의 얼굴로만 바라보려 한다. 극우 정치인의 한마디에 일본 전체의 의도를 읽어내고, 산케이신문과 같은 강경 보수 언론의 논조만으로 민심 전체를 재단하려 한다. 마치 내부의 논쟁도, 균열도 존재하지 않는 단일한 기계처럼 일본을 상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인식은 결국, 우리가 보고 싶은 일본만을 보는 일에 가깝다. 실제의 일본이 아닌, 기억과 감정 속에 고정된 일본. 국익 우선의 외교라면 더더욱, 그 착시의 유혹에서 먼저 벗어나야 한다.


2025년 6월 11일

소나리우스의 세음소평(世音小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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