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音小評 (2025. 6. 5)
‘12.3 비상계엄 선포’와 ‘4.4 대통령 탄핵’을 거쳐 ‘6.3 대통령 선거’에 이르기까지의 흐름을 돌아보면, 내용은 다르지만 닮은꼴의 기묘한 공통분모가 정치판을 관통하고 있는 듯하다. 실제로 국민의힘은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반자유주의적 독재자’라 부르고, 더불어민주당은 국민의힘 후보를 ‘내란을 옹호하는 반민주주의자’라 부른다. 이 상호 비난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양 진영의 전투적 수사 속에서, 실은 서로를 독재자로 낙인찍는 전장을 마주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면서도 동시에 민주주의의 적이 되어버리는 기묘한 프레임은, 민주정치라는 무대 위에서도 정치를 정상화하지 못하게 만든다.
비상계엄과 탄핵이라는, 없었으면 좋았을 일련의 사태들을 지나 정권은 다시 교체되었지만, 이 기이한 양극화의 현실이 하루아침에 봉합될 리는 없다. 지금의 정치 문법에 따르면, 누구든 대통령이 되는 순간 곧바로 ‘민주화운동’의 대상이 된다. 농담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실은 구조적 아이러니이자 비극이다. 웃기지만 슬픈, 이른바 '웃픈' 현실이다. ‘민주주의’와 ‘독재’라는 단어는 이제 당파적 공격의 도구로 소모되고, 그 낱말들이 지녔던 역사적 진중함마저 점점 퇴색해 간다. ‘보수’와 ‘진보’라는 말도 다르지 않다. 피로와 냉소, 불신이 정치 언어의 기본값이 된 풍경 속에서, 정치적 말걸기 자체가 점점 불가능해지고 있다.
이런 문법이 반복된다면, 정치는 다시 고성과 몸싸움이 난무하는 ‘동물국회’와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 채 표류하는 ‘식물국회’ 사이를 오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법과 사법 제도는 정쟁의 도구로 전락하고, 제도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갈수록 무너질 수밖에 없다. 정치 뉴스는 점점 더 피로와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고, 정치적 견해가 다르면 사돈도 맺기 싫다는 말이 더는 농담처럼 들리지 않게 될 것이다. 마침내 정치는 궤변과 가짜 뉴스, 그리고 '아니면 말고' 식의 제보와 고발로 점철된 싸움터가 되어버리고, 그런 풍경이 마치 본래 정치의 모습인 양 받아들여지는 시대가 도래할지도 모른다. 그 혼란과 분열의 틈바구니에서, 영악한 정상배들은 조용히 자신의 배를 불린다. 그렇게 도래한 정치의 일상은, 디스토피아에 다름 아닐 것이다.
맞다. '87년체제'의 민주주의는 미완성품이며, 앞으로도 민주화운동은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 요청되는 민주화는, 정권에 반대하는 진영의 목소리를 일컬어온 관성적 의미의 그것이 아니다. 여야 어느 쪽의 비방성 구호에도 휘둘리지 않는, 전혀 다른 차원의 민주화운동—우리는 그것을 ‘제3의 민주화운동’이라 불러야 한다. 그 필요성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지금의 정치 구조는 누가 집권하든 상대를 ‘민주주의의 적’으로 낙인찍게 만든다. 둘째, 여야는 모두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며 자기만이 정의라는 이항대립의 구조에 갇혀 있다. 이런 구도에서는 ‘민주화’라는 말조차 새로운 정치를 열 수 없다.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하려면, 이제는 민주화라는 개념의 차원 자체를 바꾸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정치철학자 마루야마 마사오가 말했듯, 민주주의는 영구혁명이다. 맥락은 다르지만, 그렇기에 한국의 민주정치 또한 이제 또 하나의 껍질을 벗어야 한다. 그 탈피의 이름은 ‘숙의’다. 숙의는 단순한 찬반 투표도, 말싸움도 아니다. 서로 다른 의견을 경청하고,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공동의 해법을 모색하는 공공적 대화 방식이다. 토론이 승부를 겨루는 것이라면, 숙의는 공감을 통해 접점을 찾는 과정이다. 무엇보다 숙의는 고립된 개인의 판단이 아니라, 시민들이 함께 참여하는 집단적 숙고를 통해 형성된다. 숙의민주주의는 바로 그 숙의를 정치의 중심에 놓는다. 차이를 확인하고 조율하며, 갈등을 재정의하고 해결책을 재구성하는 정치적 말하기의 기술이다.
물론 이러한 전환이 쉽지는 않다. 기존의 정당 체제는 변화 자체에 저항하고 있으며, 개헌 논의에서도 숙의의 가치는 주변에 머물러 있다. 해방 이후, 찬탁반탁, 전쟁과 분단, 권위주의체제와 민주화운동을 거치면서 형성된 한국의 정치적 상상력은 여전히 숙의보다는 동원, 대화보다는 대결에 익숙하다. 말과 표는 늘 전선을 따라 움직이고, 정당성은 적을 향한 분노 속에서 주조된다. 진영을 가리지 않고 반복되는 ‘단일대오’라는 구호는 내부의 이견조차 억압하는 전투적 언어가 정치를 어떻게 포획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런 정서적 습관은 숙의라는 새로운 정치 문법이 들어설 여지를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은 있다. 한국은 숙의민주주의에 대한 실험과 잠재력을 동시에 지닌 나라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신고리 원전 5·6호기 건설 여부를 둘러싼 찬반 대립 속에서 시행된 국가 차원의 공론화였다. 이 과정에는 무작위로 선정된 시민들이 사전 정보 학습과 전문가 토론을 거쳐 최종 의견을 형성하는 ‘토론형 여론조사(deliberative polling)’ 방식이 적용되었다. 객관적인 정보 제공과 집단적 숙고를 통해 보다 성숙한 여론을 형성하려는 이 실험은, 제한된 시간과 범위에도 불구하고 숙의민주주의 제도화를 위한 현실적 가능성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참고할 만한 사례도, 그 과정을 설계하고 이끌 역량을 갖춘 전문가도 이미 우리 사회 안에 존재한다. 다만, 그 가능성이 이어지지 않았고, 이어지도록 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물론 숙의민주주의가 만능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존재하느냐, 그리고 지속되느냐에 따라 한국 정치의 양상과 품격은 분명히 달라질 것이다. 제왕적 대통령제, 위성정당을 조장하는 선거제도 역시 더 이상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다. 개헌 논의 역시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된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정치와 제도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려면, 국회의원과 고위 공직자에 대한 윤리 규정과 심사 제도 또한 전면적으로 정비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어떤 제도개혁도 숙의의 과정이 결여된다면, 결국 또다시 정쟁의 도구로 소진될 위험이 크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숙의의 제도화’는 단지 하나의 과제가 아니라, 모든 개혁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숙의는 제도개혁의 방법론이자, 시민의 정치적 자각을 이끌어내는 새로운 정치문화다. 정치적 말길이 기묘하게 왜곡된 시대, 그 막힌 길을 다시 여는 일은 숙의의 복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제21대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금, 우리가 정치에서 요청해야 할 것은 숙의의 언어이며, 기대해야 할 것은 숙의의 리더십이다. 그것이 바로, 제3의 민주화운동이다. 급한 대로라도, (1) 개헌을 포함한 향후 제도 개편과, (2) 정치에 대한 신뢰 회복을 위한 국회의원 및 고위 공직자 윤리 심사 제도 개혁에 관한 숙의 프로세스를, 지금이라도 당장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 민주주의의 다음 단계를 여는 최소한의 출발 아닐까?
2025년 6월 5일
소나리우스의 世音小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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