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가능성, 그 절박함의 문명사적 맥락: 빈곤과 격차

지편서정: 지구의 편에 서기 위한 정치 <제6화>

by 완서담필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말은 어떤 문명사적 맥락에서 비롯되었을까. ‘지편서정’ 제6화에서는 빈곤과 격차라는 사회경제적 조건에 주목합니다.


산업혁명은 수천 년 동안 거의 평행선을 그리던 인류 문명의 곡선을 단숨에 수직으로 끌어올렸다. 마치 우주 로켓이 발사대를 박차고 솟구치듯, 자원과 에너지, 식량과 상품의 생산과 소비가 수직으로 치솟았고, 지구 위의 인류는 전례 없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 상승이 곧바로 빈곤의 해소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010년 현재 하루 1.25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절대 빈곤 인구는 전 세계적으로 12억 명에 이른다. 당시 한국 기준으로는 편의점 삼각김밥 하나와 자판기 커피 한 잔을 사면 사라질 정도의 금액이다. 절대 빈곤은 특히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와 남아시아에서 심각하게 나타난다. 이들 지역은 대체로 항구에 접근하기 어려운 지리적 조건을 지니고 있어, 오늘날까지도 교역 환경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다. 기후 조건 역시 척박하다. 가뭄과 태풍 같은 자연재해가 잦고, 말라리아와 같은 치명적 질병의 위협도 상존한다. 대부분의 국가는 과거 유럽의 식민지였으며, 이 경험은 독립 이후에도 구종주국에 대한 경제적 종속이라는 문제를 남겼다. 식민 지배의 잔재로 지역 간 혹은 인종 간의 반목이 지속되고, 이것이 정치적 혼란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요인들이 복잡하게 얽히며, 이 지역의 경제 발전은 여전히 더딘 상태에 머물러 있다.


이렇게 절대 빈곤이 고착된 지역에는 일정한 패턴이 반복된다. 가난한 지역일수록 출산율이 높고, 인구는 급격히 증가한다. 그러나 빈곤은 자녀에게 교육이나 의료 등, 잠재력을 키우는 데 필수적인 기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게 만든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제대로 된 직업을 얻기 어렵고, 다시 빈곤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가난은 일자리와 역량 개발의 기회를 가로막고, 또 다른 가난을 낳는다. 이 악순환은 가난이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구조다. 가난한 나라의 주요 수입원은 대개 소수 천연자원의 개발에 의존하지만, 그 수익의 대부분은 국가 부채 상환이나 군비로 소진된다. 이로 인해 자원은 남획되고, 남은 자원을 둘러싼 분쟁은 더욱 격화된다. 그 결과, 경제적 기반뿐 아니라 환경적·사회적 지속가능성의 토대도 점점 약화된다. 이러한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가장 가난한 지역에 대해서는 국제사회의 지원이 요구된다. 절대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한 마중물로서 국제 원조가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문제는 절대 빈곤만이 아니다. 상대적 빈곤 역시 심각한 문제다. 여기서 말하는 상대적 빈곤이란, 흔히 오해되듯 단순히 잘사는 사람이 더 잘사는 사람을 보며 느끼는 박탈감이라는 뜻이 아니다. OECD는 각국의 균등화 가처분소득 중위값—세금과 사회보험료를 뺀 뒤 가구가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소득을 가구 규모에 따라 조정하고, 이를 기준으로 모든 가구를 줄 세웠을 때 정중앙에 해당하는 가구의 소득—의 절반을 빈곤선으로 정하고, 이 선 아래에 위치한 사람들의 비율을 상대적 빈곤율이라 정의한다. 물론, 상대적 빈곤은 선진국에도 존재한다. 예컨대 2009년 기준 일본의 빈곤선은 연간 112만 엔으로, 이는 월 수입 약 9만 엔, 하루로 환산하면 약 3천 엔 수준의 실질 소득에 해당한다. 일본 사회의 기준에서 보면, 이는 매우 궁핍한 생활이다. 일본 후생노동성의 조사에 따르면, 일본의 상대적 빈곤율은 16%에 달한다. 다시 말해, 선진국인 일본에서도 여섯 명 중 한 명은 빈곤선 이하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OECD 평균이 약 10%임을 감안하면, 일본의 수치는 선진국 가운데서도 높은 편이다. 미국의 빈곤율은 일본보다 더 높으며, 북유럽 국가들이 6~8% 수준으로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이는 충실한 복지 정책의 효과로 해석된다. 한국의 상대적 빈곤율은 2022년 현재 14.9%다.


빈곤 문제와 더불어 소득 격차 역시 중대한 과제다. 무엇보다 소득 격차가 확대되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라 할 수 없다. 격차는 사회의 유동성을 해치고, 빈곤의 악순환을 더욱 고착시킨다. 가난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교육 기회를 얻기 어려우며, 다시 가난한 어른이 될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부유한 가정의 아이는 양질의 교육을 받고, 또다시 부유한 어른이 된다. 모든 사람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기본적인 필요의 충족이라는 관점에서 정의되는 공정성에 입각한 부의 재분배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 격차는 더욱 벌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소득 격차는 사회 통합을 방해할 뿐 아니라, 중산층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결국에는 경제 성장의 동력마저 약화시킨다.


이러한 현상은 경제 선진국에서도 예외 없이 나타난다. 소득 격차를 비교하는 지표인 지니계수—값이 0에 가까울수록 소득 분포가 평등하고,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하다는 것을 뜻하는 지표—에 따르면, 선진국 중에서는 미국의 소득 격차가 가장 크다. 미국에서는 상위 1%가 전체 소득의 약 24%를 차지하고 있다. 일본도 예외는 아니다. 노동시장 규제 완화로 인해 비정규직이 급증했고, 이는 소득 격차를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워킹 푸어’라는 표현이 시사하듯, 일을 해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일본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일본의 지니계수는 1983년 이후 꾸준히 악화되어, 2013년에는 2010년보다 0.0168포인트 오른 0.5704를 기록했다. 2007년 일본 국립사회보장·인구문제연구소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경제적 이유로 전기나 가스 요금을 체납한 가구는 전체의 약 5%에 이르렀고, 5~6가구 중 한 가구는 식량이나 의복을 제대로 구입하지 못한 적이 있으며, 20가구 중 한 가구는 보험료를 납부하지 못해 건강보험증을 압수당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2021년 국가발전지표에 의하면, 가처분소득을 바탕으로 한 지니계수는 한국이 0.333으로, 미국(0.375), 영국(0.354)보다는 낮지만, 폴란드(0.261), 헝가리(0.278), 스웨덴(0.286), 캐나다(0.292) 등과 비교하면 여전히 높은 수준으로 나타난다.


이제 격차 문제는 단순한 사회문제를 넘어 중대한 정치적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2011년 9월, 미국에서는 ‘월가를 점령하라!’는 구호 아래 소득 격차에 항의하는 풀뿌리 운동이 벌어졌다. ‘우리는 99%다!’라는 슬로건은 시드니, 베를린, 런던, 파리, 도쿄, 서울 등 세계 주요 도시로 확산되었다. 2016년 미국 대선 민주당 경선에서는 ‘민주적 사회주의자’를 자처한 버니 샌더스가 젊은 층을 중심으로 전례 없는 지지를 받았다. 격차 해소를 위한 그의 공약이 유권자들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미국에서 이러한 정치적 사건들이 잇따라 일어났다는 사실은, 오늘날 격차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회역학자 리처드 윌킨슨에 따르면, 소득 격차는 사회의 거의 모든 문제를 악화시키는 근본 원인이 된다. GDP가 높은 나라라 하더라도, 소득 격차가 크면 국민의 삶의 질은 오히려 낮아지는 경향이 있다. 격차가 큰 사회는 그렇지 않은 사회에 비해 정신질환, 평균 수명, 유아 사망률, 비만율, 학업 성취도, 청소년 임신, 살인율, 수감률 등 거의 모든 지표에서 더 나쁜 결과를 보인다. 그 작동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다. 격차가 큰 사회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경쟁이 과열되고, 사회적 지위에 대한 불안이 커진다. 이 불안은 공동체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키며, 개인은 만성적인 스트레스에 노출된다. 이러한 스트레스는 건강을 해칠 뿐 아니라 일탈과 폭력, 범죄의 유인으로 작용한다. 격차가 클수록 이러한 경향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빈곤과 격차의 문제는 단순한 소득 증대나 임금 인상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가능성을 펼칠 기회를 잃는다는 점에서, 단지 경제적 지표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질과 존엄의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빈곤과 격차는 사회 전체에 해로운 문제들의 근원이 되며, 이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 한 인간다운 삶, 살아갈 만한 삶은 기대하기 어렵다. 산업혁명은 분명 인류에게 물질적 풍요를 안겨주었지만, 그 풍요는 빈곤과 격차의 해소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이 문제는 경제 성장만으로는 풀 수 없으며, 공정한 부의 재분배라는, 경제 성장과는 다른 차원의 해결책을 요구한다. 더 심각한 것은, 산업혁명 이후 지속되어 온 경제 성장이 지구 생태계를 피폐화시킨 끝에, 이제는 그 성장 자체가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려운 지점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다음 글에서는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절박한 요청이 등장하게 된 또 하나의 문명사적 배경으로, 산업혁명 이후 전 지구적 경제 성장이 어떻게 생태적 위기의 문을 열게 되었는지를 짚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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