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무너지지 않을 걸 알지만...
열다섯 번? 아니 스무 번쯤? 그 이상일지도 모르겠다.
또, 떨어졌다.
나는 드라마 작가 지망생이다.
어느덧 9년 차. 각종 공모전에 도전하고 떨어지고, 다독이고 또 쓰고, 도전하고 떨어지고, 좌절하고..
우습게도 절필 선언도 했다가 끝내 다시 돌아와 앉은, 지.망.생.
거절당하는 일, 떨어지는 일, 밀쳐지는 일이라면 이력이 나기도 했다. 뭐 한 두 번 겪는 일인가.
또 쓰면 되지, 떨어지는 게 겁나는 게 아니라 쓸 게 없는 게 진짜 두려운 거다, 그럼 정말 끝내야 하는 거니까.
그렇게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가며 9년째 달리고 있는데,
사실 이제 좀 지친다.
이 길을 오느라 크게 포기한 건 없지만, 그래도 내가 내 친구들처럼 결혼하고 애 낳고 번듯하게 가정이란 걸 꾸려 살고 있지 못하다는 자각이 들면, 마치 내가 '꿈'을 위해 그 많은 걸 포기한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그건 별개의 일이다. 나를, 속이지 말자.
기회가 있었다면, 결혼하는 삶을 위해 노력했다면 가능했을 일이다. 아마도.
매일 묻는다. 계속해도 될까? 해도 해도 안 되는 걸까?
여태까지 내린 답은 모르겠다였지만 오늘은, 계속해도 안 될 것 같다로 기운다.
내가 먹고사는 업은 방송작가다. 어느덧 18년 차.
3분짜리 영상 구성을 몇 번째 빽, 당하면서 자존감이 와르르 무너졌다. 오늘의 일이다.
먹고사는 업에 지쳐서, 몸 쓰는 일을 하자 해서 알바를 시작했다. 주방 설거지. 어느덧 3개월 차.
사장님이 한 말을 잘 못 알아듣고 엉뚱한 짓을 했다. 한 소리 들었다. 역시 오늘의 일이다.
가슴부터 발끝까지 내려오는 비닐 앞치마를 입고, 면장갑에 고무장갑을 끼고
마스크를 쓰고 더운물에 설거지를 하면서, 눈물 콧물이 쏟아졌다.
땀인지 눈물인지 콧물인지...범벅이 됐고.
사기로 된 그릇들을 놓치지 않으려 손끝에 안간힘을 쓰면서 저절로 이가 악 물어졌다.
아..그만 세상이 무너졌음 좋겠다.
그럼 모른척하고 나도 같이 무너질 텐데...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고, 오늘이 내일로 건너가기 직전 이 시간, 오평 방구석에 앉아 이 글을 쓴다.
세상이 무너졌음 좋겠다라고...
그러나 무너지지 않을 걸 알아서, 나는 다시 끝내 일어서야 한다는 것도 안다.
그래도 잠시만, 아주 잠시만 엎드려 있다가 아주 조금만 더 울다가
오늘의 일들을 모두 모른 척하고 내일은 일어나야지.
그리고 또,
9년 차, 18년 차, 3개월 차에 접어든 그 일상을 빈틈없이 꾸려가야지.
세상이 무너진다면 모를까,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