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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평 Jul 17. 2020

고백

....하지 말라니까. 

그와는 1년 가까이 같은 팀에서 일했지만 만난 적도, 통화를 한 적도 없다. 

그에 대해 알았던 건 하고 있는 일과 이름뿐.   

팀원들의 연락처를 뒤적이면서 참 특이한 성씨도 다 있네..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다 일이 거의 마무리되어갈 때쯤 인사를 하게 됐고, 같은 공간에 머물게 됐다. 

일하다 우르르 몰려가 같이 밥을 먹고,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시답잖은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밤을 새기도 하고, 두어 번 차를 얻어 타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가 좋아졌다. 

그 무렵 일이 마무리됐고, 팀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계절이 바뀌고,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갈 무렵. 

그를 다시 일로 만났다. 


설렜다. 

일도 신바람이 났다.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 그는 내 일상의 활력소였다. 

그때의 나는 괜히 웃었고, 괜히 말이 많았고, 괜히 사람들에게 커피를 샀고, 괜히... 투덜대기도 했다. 


'니가 좋아, 좋다니까.' 

그 마음이 티가 났을 테지, 왜 안 났을까. 

하지만 그가 알게 해서 복잡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저 매일 아침 꿀떡 삼키는 비타민 정도면 충분하다 생각했다. 

절대, 여기까지만...이라고 혼자 마음으로 선을 긋고 있을 즈음. 


그와 단둘이 카페에 앉아 있을 기회가 왔다. 

명분은 아이템 회의였다. 


"따뜻한 거 드시죠? " 


그가 커피를 샀다. 한여름에도 따.아를 고집하는 나의 취향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한겨울에도 아.아를 고집하는 그의 취향을 나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온도차가 확연한 두 잔의 커피를 가져와 앉은 그는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나는 속으로 외쳤다. 


'아...안 돼, 안 된다니까. 아직은 고백...(하지 말라니까).' 


그때,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얼음을 와자작 깨 먹고 난 그가 말했다.  

"저 여자 친구가 있는데요...." 


그의 고백이었다.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할지 몰라 주문한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꿀떡꿀떡 삼켰다.

입천장이 다 까지는 줄도 모르고.  

태연한 척 굴었지만 또, 티가 났을 테지. 내가 어버버하고 있는 사이, 그가 말을 이었다. 


"여친이랑 얘기하다 생각난 아이템이 있어서..." 


그 뒤로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회의가 끝나고 입속만큼 속이 쓰라렸다는 기억만 있을뿐. 

그 아이템은 진행됐고, 그 뒤로도 몇 달을 그와 같이 일했다. 


그 몇 달 나는 괜히 정색했고, 괜히 정중했고, 괜히...쿨 했다. 

아마 그도 알았을 테지. 나의 돌변을. 

아니 그보다 더 먼저, 자신에게 기우는 내 마음을 눈치 채고는 

회의를 가장해 내게 느닷없는 고백을 한 것이었을 테지. 여자친구가 있다고.  


그러게 남몰래하는 사랑은 없다.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들키는 법이다. 

나를 보던 그도 아슬아슬했을 테지, 저 여자가 고백이라도 하면 어째야 하나...


고백의 타이밍을 잘 맞춰준 그가 이제와 새삼 고맙다. 

그래도 하지 않았더라면, 내 신바람 나는 일상이 조금은 더 길어질 수 있었을 텐데..하는 아쉬움은 남았지만. 


그로부터 계절이 또 몇 번 지나갔고....새로울 것 없는 일상에서 나에게 묻는다. 

다시, 반짝일 수 있을까? 

무엇으로든 다시 반짝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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