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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평 Jul 18. 2020

버티는 나날

아직 내 운명의 기회는 오지 않았다 

허리 한 번 펼 틈도 없이 밀려 들어오는 그릇, 접시, 두툼한 스테인리스 솥, 수저, 소스통..

모양도 무게도 제각각인 설거지 감들을 열심히 닦다가 별안간, 불쑥, 그 남자애가 생각났다. 


나와 초등학교, 중학교를 같이 다녔던 그 아이는 운동을 잘했다. 

육상 선수였던가, 축구 선수였던가... 그랬다. 

체육시간과 운동회를 질색팔색 하던 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뿐인가 키도 제법 커서 역시 나와는 거리가 먼, 뒷자리에 앉았다.  

하얀 피부에 쌍꺼풀이 짙었고, 얼굴이 자주 발개지는 아이였다. 

우리나라 대통령 중 한 명의 이름과 같아서 그 이름도 까먹질 못한다.


그 친구가 생각난 건,  20살이 조금 넘은 어느 날의 기억 때문이다. 

그러니까 벌써 20년 전의 일이라 명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성인이 된 후 그 아이가 연락을 해왔고, 

내가 다니던 학교 근처에서 우리는 만났다. 

그때 그 아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해서 이미 돈을 버는 사회인이었고, 

나는 소소한 아르바이트를 하며 취업을 걱정하는 척하면서도 청춘의 낭만..같은 걸 즐기던 학생이었다. 

그 아이가 밥을 샀겠지 아마도. 커피 정도는 내가 샀으려나..

돈을 버는 직장인이었지만 그때까지 차는 없어서 버스를 타고 나를 찾아왔던 것 같다. 

헤어지면서 나눈 버스정류장에서의 대화가 생각난다. 


"아(애)가 와 이래 비실비실하노. 보약 좀 사서 집에 보내야겠네." 

"니는 꿈이 뭔데? 그 꿈..내가 뒷바라지해 주면 받을래?" 


알고 있었다. 그 아이가 나를 오랫동안 좋아해 왔다는 걸. 

소문으로도 알았고, 그 아이가 열다섯 살 내 생일에 전해준 시집으로도 알았고, 

무엇보다 언제나 내 앞에서 발개지는 수줍은 얼굴이 그 아이의 마음을 모를 수 없게 했다. 

하지만 한 번도 그 아이가 직접 내게 '니가 좋다' 고 말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짐작만 할 뿐, 

그 아이를 향해 한 발을 더 나아갈 수 없었다. 

더군다나 나는 그때 열렬히 다른 남자애를 짝사랑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십 대가 지나고 20대의 어느 날, 그 아이가 날 찾아와서 했던 

여전히 '니가 좋아'가 아닌 다른 말들을  나는 또 웃어넘겼다. 

그때도 나는 열렬히 같은 학과 선배를 짝사랑하고 있었으니까. 


그 세월이 다 지나가고 30대도 지나가고, 40대도 중반. 

얼마 전 한 친구가 동기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그 아이를 만났다면서 전화를 해왔다. 


"니 00이 기억나나? 오늘 만났는데 아직도 니가 좋은 갑더라.(깔깔) 니 이야기 나오니까 얼굴이 벌게지면서..."

"니 서울에서 방송작가 한다니까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라..잘 어울린다며." 

"결혼? 했지. 벌써 다 큰 애가 둘이라던데..결혼을 좀 빨리한 편이지. 지금? 시청 공무원이잖아. 꽤 됐을 걸." 

"니 사진 궁금하다고 카톡 프로필 보여줄랬는데...니는 와 니 사진은 한 장도 없고 맨 이상한 사진만...겨우 한 장 있는 게 그림자 사진이고..아이구." 


그 전화로 정말, 십 수년만에 그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는데 

여전히 짧은 머리에 막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남학생의 얼굴만 떠올랐다. 

중년의 가장, 두 아이의 아빠..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날, 잠시 설렜음을 인정하겠다. 한 번 보고 싶단 생각도 들었다. 

은근히, 내심, 전화를 해 온 친구가 내 번호를 그 아이에게 주지 않았을까 기대했음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때뿐. 또 시간은 흘렀고.. 


그러다가 오늘, 밀려오는 설거지 그릇들을 어깨가 빠져라 손목이 떨어져라 닦으면서 

그 아이가 생각났던 건, 내 닥친 현실이 지층을 뚫고 지하 수천 킬로미터로 떨어진 것 같아서였다. 

마치 지금 이 현실이, 그 아이의 마음을 그때 모른 척한 탓인 것처럼. 


그때 만약 우리의 미래를 같이 해 보지 않겠니, 하고 그 아이가 내민 손을 잡았다면 

이 황금 같은 금요일 밤에 저녁도 거른 채 죽어라 설거지를 하고 있지는 않아도 됐을까? 

드라마를 쓰겠다며 10년 가까이 근근이 굶어 죽지 않을 만큼만 되는 벌이를 하며 살지 않아도 됐을까?

이 나이가 되도록 집도, 남편도, 아이도, 소속도 없이 3無, 4無, 5無...를 갱신하며 살지 않아도 됐을까? 


이런 생각 때문에 내 현실은 지하 수천 킬로미터를 지나 수만 킬로미터 나락으로 떨어졌다. 

결혼해서 남편의 뒷바라지를 받으며 글을 썼다는 성공한 이들의 인터뷰를 보고 들으며

내게도 남편이 있었다면...생각했을 때가 많다. 

그렇게 나는 누군가의 탓을 하고, 누군가의 덕을 입고 살고 싶은 사람인 걸까. 

결국 탓을 하듯 덕을 보든 다 나에게서 비롯된 것일 텐데. 


식당 설거지는 힘들다. 

'식당 설거지라도 해서 먹고살면 되지' 라고 가볍게 말했던 지난날을 후회한다. 

그러나 그렇게 힘들어서 좋을 때가 있기도 하다. 오늘 같이 마음이 복잡한 때다.  

무한반복되는 닦고, 닦고, 닦고...를 하다가 어느덧 무념무상의 순간을 맞게 되고, 

그러다 마감을 맞는다. 쏜살같이 지나간 다섯 시간 끝에 귀가. 


지하 수만 킬로미터를 항해하다 돌아온 날, 

바라보는 내 '오평'은 때로 회한(씩이나)의 눈물을 짓게 만들지만  

언제나 그렇듯 내 좌절은 길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섯 시간짜리 초강력 육체노동은 좌절할 틈도 주지 않고 잠을 밀어온다. 

잠결에도 다짐한다. 

그래, 당분간은 이렇게...버티자. 버틸 수 있다면 이룰 수 있다. 뭐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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