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평, 가평, 양평 이런 데 말고...
서울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한 언니의 25평 아파트 작은 방에서 내 서울살이도 시작되었다.
조카 1호가 막 돌을 맞았을 때여서 언니에겐 육아 도우미가 필요했고,
회사가 멀어 새벽같이 출근해서 한밤중에 퇴근하는 형부와 부딪힐 일은 없었다...지만
지금 와 생각하면 누구에겐 편했고, 또 누구에겐 편치 않은 환경이었을 게다.
나는 마치 그 불편함을 내 노동력으로 상쇄하려는 듯 열심히 육아와 가사 노동을 분담했다.
그때는 대학원에 다니던 시절이라 벌이도 없었고, 4년 간 벌어놓은 돈을 학비에 털어 넣느라 가진 돈도 없었다.
생활비를 내 노동력으로 때웠고, 자매라는 이유로 가족이라는 이유로 큰 미안함 없이 살았다. 뻔뻔했다.
2년 뒤 조카 2호가 태어났고, 언니는 30평형 대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때도 나는 가난했다. 대학원 막바지였고, 논문을 준비하느라 짬짬이 알바를 하며 버텼다.
'이제 그만 독립할래' 말할 용기가 없었으므로 또 뻔뻔하게 방 한 칸을 차지하며 살았다.
대학원을 졸업하고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서울에선 지방에서 일한 내 경력을 반토막으로 취급했고,
학교 다니느라 까먹은 2년이 있었던 터에 작은 제작사에서 적은 원고료를 받으며 많은 일을 했다.
여전히 벌이는 바닥이었지만 그때부턴 적으나마 생활비를 낼 수 있었다.
그 나머지는 여전히 가사노동과 육아 분담으로 충당하면서 마음의 빚을 덜었다.
그렇게 나의 서울살이가 10년을 채워갈 무렵이었나.
조카 1호가 중학생이 되고, 조카 2호도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각자의 방이 필요한 때가 찾아왔다.
그 무렵 슬슬 나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 정권이 시작된 그 해 그 봄 나는, 독립했다.
언니 집에서 큰길 하나를 건너면 있는 원룸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오평'에 내 살림을 꾸린 것이다.
부모님은 내가 집을 얻어 독립한 줄 알지만, 실은 '방'을 얻어 나온 것이다.
부모님의 믿음을 배반하고 싶지 않아서, 두 분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오평'을 최대한 5평스럽지 않게 사진을 찍어 전송했다.
마치 '*방' 같은 사이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사진들 있지 않은가, 가로로 또는 세로로 심하게 왜곡된.
하지만 부모님을 오래 안심시킬 순 없었다.
반년이 지났을 무렵, 서울 언니네에 다니러 온 부모님이 내가 일하러 간 저녁에 '오평'을 방문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반응은 "서울집이 솔다 솔다 하더니 이런 줄은 몰랐네, 이래 좁아서..."
엄마의 반응은 "작아도 있을 건 다 있네. 혼자 살기 이만하면 됐지..그래도 담에는 큰 데로 이사해야겠더라."
두 분에게 충격이었을 게다. (하긴 나에게도 충격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동안의 내 서울살이 10년을 한심스러워했을지도 모르겠다.
이후 두 분의 걱정은 나날이 커졌고, 무슨 때가 되어 용돈을 보내드리거나 가족의 경조사를 챙길 때면
'이런 거 챙길 생각 말고 돈 모아 집 살 생각 해라'란 말을 꼬리표처럼 붙이신다.
그거 모아도 '대박'이 터지거나 '대빚'을 지지 않는 서울 땅에 집 사기는 글렀다고 말하고 싶지만....
부모님의 희망까지 꺾지는 말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말을 줄였다.
최근(뿐일까마는)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판판이 예상을 빗나가며
오히려 집값을 올리고 집 없는 사람들을 울리고 있다.
나도 예전보다는 더 유심히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1인 가구에겐 청약도 유명무실이라며 깔보던 내가 얼마 전 청약통장을 만들었다.
유명유실해 질 가능성은 여전히 없어 보이지만 기본이라는 청약통장도 없는 나를
사람들이 하도 한심하게 생각해서 그냥, 한 번 들어봤다. 저축도 할 겸.
오평 탈출을 위한 첫걸음..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대체 몇 걸음을 걸어야 탈출할 수 있을지는 감이 오지 않는다)
모름지기 첫 독립은 소박하게, 라고 누추한 현실을 애써 덮었지만
꿋꿋하고 유쾌하게 오평 일기를 써보려 하지만
온전히 웃을 수만은 없는, 그래서 '웃픈' 일기가 될 가능성이 큰 오평 일기를 시작해 보려 한다.
아, 안 웃기고 안 슬픈 일기가 될 수도 있겠다..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