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어?
그날은,
오평에 살게 된 지 반년쯤 됐을 무렵의 어느 초겨울 밤이었다.
자정이 넘었을까. 늘 그래 왔듯 마무리 못한 일 때문에 샤워를 하고 나와 책상에 다시 앉았다.
노트북을 켜고 쨍한 윈도우 바탕화면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는데 뭔가 싸한 기분이 들었다.
그냥 기분이겠지..무시하려는데 와이파이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아, 할 일도 많은데 또 왜 이러니?
공유기를 껐다 켰다, 노트북을 껐다 켰다..그렇게 두 어번 반복하다 아무래도 싸한 기분이 묘했다.
tv를 켰다. 파란 모니터에 선명한 '신호 없음'이 화면 위를 둥둥 떠다닌다.
뭔가 문제가 생겼구나, 하는데 보일러가 꺼져 버린 사실도 그때 알았다.
모든 게 먹통이다. 단절.
한밤중에 들려오던 벽 너머 다른 이들의 생활소음조차 들리지 않는다.
다 먹통이라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 것일까. 뭔가 싸한 기분은 그래서였나?
백색소음처럼 나를 안정시켰던 주변인들의 소리가 사라져서 불안했던 걸까?
그래서였나, 남은 일은 핑계였고 길 하나 건너 언니네로 피신해야겠단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보이는 대로 옷을 집어 껴입고, 노트북을 싸안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을 연 그때,
나도 먹통이 돼 버렸다. 일시 정지.
문고리를 잡은 채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바라만 보았다.
센서등이 나간 복도는 캄캄했고, 복도 바닥 아래쪽 비상등마다 초록불이 켜져 있었다.
거기에 우주인 같은 복장의 사람들이 줄을 이어 걸어 다니고 있다니,
누구들...이세요?
말은 나오지 않고 그제야 매캐한 공기가 훅, 폐 속으로 들어왔다.
!!!!
수초 만에 정신이 돌아온 내 입에서 튀어나온 첫마디는 "여기서 뭐하세요?"
여기서 뭐하세요, 라니.
나의 태연한 물음에 저쪽도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 화재 사고가 있어서요..."
우리의 대화는 참 태평하게 이어졌다.
"예? 어디서요?"
"여기 3층 보일러실에서요."
"아, 예..."
"혹시 몰라 점검 중인데 괜찮으니까 들어가세요."
"아니요, 제가 나가던 길이어서...나갈 수는 있는 거죠?"
"예, 저기 계단으로 가세요."
"예..수고하세요.."
계단으로 향하는 그제야 목구멍이 따갑고 눈이 맵다는 걸 깨달았다.
연기는 자욱했고, 3층 보일러실은 제법 검게 그을려 있었다.
건물 밖으로 나오니 출동한 소방차와 그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나의 이웃들일지도 모를 사람들, 단 한번 인사를 나눈 적 없던 사람들, 벽 너머 살고 있는 사람들.
그러나 그 상황에도 서로 아는 체하지 않는 사람들...
그들은 어떻게 알고 나왔지? 이상하게 사방이 조용하다 했는데...
늘 들리던 tv 소리도, 밤늦게 밥을 먹는지 달그락대던 소리도, 찍찍 의자를 끄는 소리도,
비염환자가 사는지 그 요란하던 재채기 소리도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다 했더니.
화재 경보음도 울리지 않았고, 누구도 내 방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만약 큰불이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신고는 건물 밖 건너편 편의점 손님들이 치솟는 불길을 보고 했단다.
건물 안 사람들은 나도 그랬지만 제 방에 들어가면 세상과는 거의 단절되다시피 하니 알 길이 없었다.
웬만한 소음에는 꿈쩍도 않는 사람들이다.
나만 예민하게 구는가 싶어 혹은 원룸이 다 그렇지 뭐..하는 마음에 그냥 외면한다.
그러다보니 다를 귀를 닫고, 입을 닫은 게 아닐까. 나 역시.
그날 이후, 어떤 조치가 내려왔는지 소방시설 점검이 이루어졌다.
안내방송도 없이 화재 경보음이 울려 식겁하는 날이 이어지다가
2주쯤 지나 소방시설 점검을 완료했다는 게시글이 붙었었다.
다행히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그날 이후 내 생각은 좀 달라졌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사람 사는 소리가, 문을 쾅쾅 여닫든말든 사람 드나드는 소리가,
복도를 또각또각 쿵쿵 울리는 발자국 소리가,
모두 반가워졌다.
그리고 나도 가끔 소리를 낸다.
tv 볼륨을 조금 키우며 벽 너머 사람들에게 생존 신호를 보낸다.
"나 여기 있어요. 당신도 거기 있는 거죠?"
그렇게 오평 일상의 불안은 조금씩 잦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