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껏 소리 높여 사랑하라
오평에 이사 온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엘리베이터 안에 관리자 이름으로 A4 용지에 프린트된 공지글 하나가 붙었다.
"입주민 민원 사항입니다. 밤 10시 이후 소음을 유발하는 행위는 자제해 주십시오.
예) 세탁기, 운동, 큰 소리로 tv 보기, 그 외 기타.."
보통의 공동주택에서도 한밤중엔 조심해야 할 일이라 그런가 보다 했다.
다만 '그 외 기타..'에 조금 눈이 가긴 했지만.
그리고 그날 밤이었다.
자정이 막 넘어가던 시간, 나는 늘 하던 대로 노트북을 켜 놓고 뭔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타닥타닥타다닥...
내가 두드리는 키보드 소리 위로 어디선가 희미하게 여자의 흐느낌 같은 게 들려왔다.
응?
잠시 키보드 두드리기를 멈추고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흐느낌이 아니었다.
때로 짧고 때로 길게 빠지기도 하는, 신음소리와
그 위로 구별되는 또 다른 목소리가 겹쳐졌다. 조금 굵고 낮은 듯한, 그러니까 사내의 목소리.
두 개의 사운드가 제멋대로 널을 뛰었다. 그때야 깨달았다.
'그 외 기타' 행위가 벌어지고 있다는 걸.
그나저나 이럴 땐 어떡해야 하나? 처음 당해보는(?) 일이라 혼자 있는데도 난감했다.
비디오 없이 오디오만 듣고 있으니 활자로 읽는 것과는 또 다른 상상을 불러왔다.
짜증이 나거나 화가 나진 않았고 다만 조금 안쓰러웠다.
저들도 '오평'이 처음인 사람들인가,
그래서 자신들의 행위가 유발하는 소음이 벽을 타고 사방으로 퍼지고 있음을 몰라서 그런 것인가.
알게 되면 얼마나 무안하고 민망할 것인가.
내가 할 수만 있다면 더 큰 소음으로 단 5분이라도 건물 전체를 덮어주고 싶었다.
두 사람이 열심히 사랑하라고.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그들의 일은 끝났고, 사방은 조용해졌다.
언제 그랬냐는 듯.
나도 언제 그랬냐는 듯 타닥타닥타다닥...소음을 일으키며 다시 앉아 하던 일을 계속했다.
설마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까지 옆방에 들리는 건 아니겠지?
소음을 유발하는 기타 행위를 내가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잠시 잠깐 의심하면서, 그래서 조금 더 조심하면서.
그날 이후로도 제법 오래 깊은 밤 그들의 '기타 행위'는 계속되었고, 나는 그런 밤마다 5분씩 귀를 틀어막았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누군가의 은밀한 사생활을 훔쳐 듣는 것 같아 기분이 영 찜찜했기 때문이다
그즈음 한 친구에게 이 얘기를 하며 솔루션을 요청했더니 돌아온 답이 '한 달만 참아봐' 였다.
엘리베이터에 포스트잇을 붙여봐, 정도를 기대했는데.
친구의 '한 달'은 대체 어디서 나온 셈법이었을까? 경험치 같은 걸까?
어디서 나온 셈법이든 놀라운 건 정말 한 달이 지난 뒤 그 소리는 사라졌다.
사랑이 식었나? 헤어졌나? 뒤늦게 깨닫고 딴 데를 찾아갔나? 민원이 발생했나? 아예 이사를 갔나?
나는 그 커플의 사연이 잠시 궁금해졌지만 또 타인의 일이라 금세 잊었다.
그 뒤로도 공지글은 아랑곳없이 밤도 낮도 없이
누군가는 세탁기를 돌렸고, 누군가는 내 속이 울렁거릴 만큼 속을 게워내기도 했고,
누군가는 취한 김에 기타를 연주하기도 했고, 누군가는 청소기를 돌리기도 했고,
또 누군가는 친구들을 데려와 밤새 파티를 열기도 했다.
그러나 누구도, 다시 이 건물에서 사랑을 나누지는 않는 것 같았다.
사랑조차 허락되지 않는 집이라....
비약이 있긴 하지만 조금, 서글펐다.
그리고 오지랖이기도 하겠지만,
이사를 간 것으로 추정되는 그때 그 심야소음 유발자들이 다른 어디에서라도
마음껏 소리 높여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곳에선 어쩔 수 없이 작은 소리에도 민감해진다.
벽간소음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막상 닥쳐보니 상상 이상이다.
예를 들면, '지이이잉...' 내 책상에서도 울리고 어디선가에서도 울리는 휴대폰 진동.
당신도 받았군요, 나도 받았답니다. 우리는 역시 같은 동네 주민이네요.
[00구 확진자 0명 발생]
또 다시 '지이이잉...'
아이고. 또 받았어요. 이번에는 중대본의 메시지군요.
[올바른 마스크 착용법]
외출할 땐 마스크 꼭 쓰고 손 잘 씻고, 코로나를 잘 이겨보아요.
나는 이렇게 벽너머의 누군가와 무언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