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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평 Sep 01. 2020

계속 써도 되겠니?  

그건 니가 정하세요 

쓰기로 한 게 있는데 (누가 쓰라고 한 건 아니지만) 

쓰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인지 자꾸 미루게 된다. 

그럴 때면 tv앞에 서서 300회의 니킥과 100회의 스쾃을 한다. 

내가 쓰지 못하는 이유에 정당성을 부여해야 하기 때문에 괜한 몸 생각, 건강생각을 하는 것이다. 


tv에선 짠희 씨가 친구들을 불러놓고 부침개를 부친다. 

재료들이 죄다 유통기한이 지나버렸다. 심지어 오일마저. 

그래도 뭐 어떠랴, 먹고 안 죽을 정도면 그냥, 먹기로 한 것 같은데 심지어 맛도 좋은 모양이다. 

그렇게 저걸 어쩌나..하는 마음으로 보다가 불현듯 나도? 하는 생각에 냉장고와 서랍장을 뒤져봤다. 

300회의 니킥을 막 끝내고 숨을 헐떡이면서. 


설마...했는데 일부러 작은 용량으로 샀던 카놀라유의 유통기한이 2019년 12월 28일로 찍혀 있다. 

제조일자인가 하고 다시 봤는데, 날짜 뒤에 '까지'란 말이 선명하다.  

내가 얼마 전까지, 아마 한 달전쯤 달걀을 구울 때 썼던 것 같은데...어쩐다. 

유통기한이 지났다고 해서 팔 수 없는 거지 먹을 수 없는 건 아니라는, 어디서 들은 게 있어 뒤져볼까 했지만 

그래도 반년이나 훌쩍 넘어버린 걸 먹기는, 그렇다. 

일단 밖으로 뺐다. 아직 절반이 남아 있는데....어떻게 버려야 하지, 난감하다.  

몇 군데를 더 뒤져봤다. 향이 너무 강해 거의 쓰지 않았던 바디 미스트도 유통기한이 지났고, 

개봉한 지 오래된 액상 소화제도 폐기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 것들을 죄 꺼내고 정리해 두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유통기한이 있어서 참 좋구나, 폐기할 시간을 알려주니 참 좋구나..하는 생각. 



마음에도 그런 게 있으면 좋겠다. 

'이 마음은 언제부터 언제까지만 유효하니 정해진 시간 이후에는 폐기하십시오'라는 

선명한 지시나 안내가 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나도 알 수 없는 내 마음을 안고, 더 가야 할지 아니면 멈춰야 할지 방황하지 않을 텐데. 


저 사람과 나의 관계가 아직은 유효한 건지, 혹시 변질된 건 아닌지 폐기 수준은 아닌지 

그런 정확한 지표가 생성 단계부터 정해져 있다면, 

그래서 서로가 관계의 유효기간을 명확히 알고 있다면, 

어느 한쪽이 돌아섰다고 다른 한쪽이 마음 아플 일도 없을 텐데. 


꿈에도 유효기간이 있다면...

뭐 이런, 생각들.  


사실 마음에도 꿈에도 관계에도 유효기간이 없는 건 아니다.

다만 그 유효기간을 정할 수 있는 게 나뿐이라서, 내가 마침표를 찍어야 끝나는 일이라서. 

그게 괴로운 일이다. 


쓰려고 한 글을 계속 못 쓰고 있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댈 핑계도 없는 날에는 괜히 몸이 아프기도 하면서. 

그래서 

이제 그만 내 꿈을 접어야 하나 그런 생각도 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아직 내 꿈의 유효기간을 내가 정하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중이다. 

'내 꿈아 안녕, 그동안 즐거웠다' 해 버리면 괴롭지 않을까. 홀가분해질까. 

그 뒤를 몰라서, 아쌀하게 굿바이를 외칠 수도 없다. 더 괴로울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그러니까 

이제 써야겠다. 다른 방법이 없다. 


앞부분에 밑줄만 잔뜩 긋다 남겨둔 '파우스트'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흔히 인용하는.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니까" 

이 말을 위안삼아 이제 나는 써야겠다. 일단 이 글을 발행하고. 

방황하고 괴로워하며, 계속. 


알 수는 없지만 이 글을 읽는 당신도 혹 나처럼 괴롭고 방황하고 있다면 그렇게 하시길. 

다른 방법이 없지 않아요? 쓰지 않고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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