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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평 Sep 05. 2020

나의 글값은 얼마일까?

그건 누가 정하나요 

오랜만에 핸드폰이 울렸다. 

보험 권유도 대출 상담도 카드회사도 아닌 아주 오래전에 일로 만난 사이, 모 씨다. 

연락처가 뜨는 순간, '아 또 뭔가 빨리, 싸게 써야 할 글이 있나 보다..' 했다. 

받았다. 

일을 아주 안 하자고 마음먹었다면 모를까, 돈을 안 벌어도 되는 상황이면 모를까 

오는 전화를 거절할 순 없었다. 


근황과 안부를 짧게 확인하고 실은 그런 게 궁금한 사이는 아니니까, 바로 본론이다. 

내 예상은 맞았고, 몇 년 전에 비슷한 상황에서 내가 거절했던 기억이 났다. 

거절했다기보다 서로의 사정이 달라서, 협의가 안 됐기 때문에 같이 일할 수 없었다. 

이번에도 우선 메일로 주시면 내용을 확인해 보고 일정과 원고료를 협의하자고 끊었다. 

연락해줘서 고맙다는 말도 덧붙였다. 


하루가 지났고, 이틀이 지나고...잊고 있었는데 어제저녁 연락이 왔다. 

더 다급하고 일정이 빠듯해진 듯 그는 그간의 상황을 사정을 얘기했지만 내 예상은, 

내부적으로 진행해보다가 전체를 내부에서 해결하기엔 역부족이라 일부만 이자까에게 의뢰하자, 

그렇게 가닥을 잡은 것으로 보였다. 


메일을 받았고, 내용을 보니 그리 어렵지 않은 작업이었다. 그러나 막상 들어가면 쉬운 일은 없다. 

그게 그렇다. 알지 않나. 



우리 제작비 넉넉해요, 하는 소리는 이 바닥에서 십 수년간 일하면서 들어보질 못했다. 

다 우는 소리를 한다. 안다. 그 말이 진심일 때도 있다. 제작사 사정 모르지 않으니까. 

그래도 안 남는 장사는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지, 내가 모를까 봐 

종종 터무니없는 원고료를 내밀며 써줄 수 없겠냐 묻는 이들이 있다. 

딴 데 가서 알아봐요, 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러진 않는다. 

미안해하며 말하는 이들에게 그럴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일이 한 번이 되고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면 어느새 당연해진다. 


그땐 그 돈 받고 해 줬잖아요, 뭐 정확한 워딩은 아닐지라도 이런 뉘앙스로 말을 하면 

그게 다 내 탓인 것 같다. 그래, 그때 내가 그랬지. 

그래도 그때 그 돈 받고 일을 했던 건, 그쪽 사정도 아니까 그랬고 

그 미안함이 있다면 다음번엔 좀 더 잘 챙겨주겠거니 하는 마음이, 얼토당토않은 기대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내게도 시간이라는 게 흘렀고, 경력이라는 게 쌓이지 않았겠나. 

그건 안중에도 없다. 어쩌면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내 글값은 바뀌지를 않나. 


답을 해줘야 할 시간이 왔다. 

전화로 하면 구구절절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주말 아침인 것을 핑계 삼아 메시지로 대신했다. 

내가 생각하는 최하 기준은 이러이러하니 맞출 수 있으면 연락을 달라고. 

바로 답이 왔다. 내가 제안한 단가는 '허걱'하는 수준이라며 이번엔 안 되겠다는 답이다. 

예상했던 답이다. 

처음 그쪽에서 제시한 원고료의 3.5배 수준이었으니 성사될 일이 아니란 걸 알고 지른 거였다. 

(그렇다고 내가 뭐 몇 백을 달랬나, 몇 천을 달랬나.. 는 아니다)

계속 이런 수준이면 이번뿐만 아니라 다음에도 같이 일할 수 없어요, 라는 진짜 할 말은 숨기고   

못 맞춰드려 미안하다는 답을 하고 앉았더니 자괴감이 밀려왔다. 

누군가의 기준엔 내 글값이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 때문은 아니고 (아주 아닌 건 또 아니지만) 

그냥 맞춰주고 한다고 할 걸 그랬나, 딱 받는 만큼만 일하면 되지 않았나, 

요즘 같은 때에 뭐라도 써서 돈을 벌었어야하지 않나...

뭐 이런 현실감각이 깨나면서 밀려온 자괴감. 


머릿속에서 계산기가 돌아갔다. 

지금 진행 중인 일이 마무리되면 입금될 돈과 그 시기. 

내 한 몸 먹여 살리는 데 들어갈 돈과 한 지인의 말처럼 숨만 쉬고 있어도 따박따박 꼬박꼬박 지불해야 하는 것들, 그리고 그 시기...


주판알 튕겨보니 아직 파산 단계는 아니라 안심하며 스스로를 다독인다. 

'그래, 잘했어, 잘한 일이야. 그래도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을 기준이란 건 있어야지, 

너를 위해서도 또 같은 업계 사람들을 위해서도 지킬 건 지키자고.'  


이 말을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해줬으면 '괜찮아, 잘했어'라고 말해주면 더 안심이 될 것 같지만

바라지 않기로 한다. 

내 위로는 내가, 한다.   

그리고 내 글값도 내가, 정한다. (아니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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