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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평 Sep 08. 2020

나를 먹여 살리는 일의 고단함  

나만 힘드니? 

냉장고에서 달걀 한 알을 꺼내 적당한 그릇에 톡, 하고 깬다. 

과일 포크로 휘휘 저어 알심을 풀고 나서 소금 한 꼬집을 넣어 다시 풀고 

거기다 생수 조금 우유 조금을 넣어 한 번 더 휘휘 젓는다. 

그리고 뚜껑을 덮어 전자레인지에 6분. 


땡! 

달걀찜이 만들어졌다. 


두통에는 타이레놀, 초기 감기엔 테라플루, 복통에는 백초..처럼 

달걀찜은 마음이 몹시 힘든 날에 내가 나에게 내리는 처방약 같은 거다. 

근사한 음식을 할 줄도 모르고, 그만한 재료도 없고, 

무엇보다 힘든 마음을 위해 음식을 해댈 기력이 없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찾은 게 달걀찜이다. 


몽글몽글한 달걀찜 한 사발을 뚝딱 비우고 나면 

어딘가 허했던 마음이 채워지고 추웠던 마음도 따뜻해진다.

별로 계절을 따지지 않아 한여름에도 통하는 위로다. 


오늘도 이 처방이 몹시 필요했다. 그러나.... 날달걀은 없다. 

오늘 출근하기 전 달걀을 몽땅 (이라고 해봐야 고작 3개다) 삶아 탱글탱글하게 만들어뒀으니까. 

찐 거나 삶은 거나 본질은 같으니... 하는 맘으로 한 알을 까서 먹었지만 위로가 되지 않는다. 

한밤중에 배만 불렸다. 


오늘, 일을 마치고 나오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머리가 복잡했고, 마음은 심란했고 

결국 버스 안에서 울고 말았다. 

다행히 비가 내리고, 마스크를 썼고, 안경 위로 계속해서 김이 서려 

다 큰 어른이 우는지 어쩌는지 알아볼 수 없...었겠지? 


일주일을 매달린 일을 엎자고 했다. 

엎자는 이유를 모르지 않는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 중 단 한 명도 될 거란 확신을 갖지 못하는데 

더 매달려봤자 뭐 하나. 시간낭비에 기력 낭비지. 나도 인정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과 나는 처지가 다르고, 상황이 달랐다. 

나는 프리랜서니까. 그렇게 엎어지면 그간 내가 얼마의 시간을 들였건 얼마의 공을 들였건 

그저 미안한 마음과 말로 수고의 대가를 대신할 뿐이다. 다른 조직에서도 언제나 그래 왔다. 

성과가 있어야 대가도 있는 것, 그러나 그 성과에 수고에 대한 지분은 없다. 

부당한 것 같은데, 정당하다는 생각이 굳혀져 왔다, 오랫동안. 


홀가분한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마감 시간도 촉박한데 차라리 잘됐다, 이런 맘도 있었다. 오늘은 저녁시간에 집에 갈 수 있겠구나 좋기도 했다. 

그 마음은 그 마음이고. 


그래도 속이 상했던 또 다른 이유는, 내 능력에 대한 자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냈지만 모두 70점짜리.

의뢰자의 눈높이에 맞추지 못했고, 의뢰자의 구미를 당기지 못했다는 자각, 

돌이켜 생각해보면 대체로 내가 낸 의견은 그렇게 계속해서 70점 짜리였다는 생각. 

백 점짜리 파트너에 내가 계속 묻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이런데도 니가 계속하겠다고? 계속 묻어가겠다고? 

갑자기 그 자리에 더 앉아있기가 너무 힘들었다. 숨이 턱턱 막히고 무엇보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서. 

부랴부랴 나와버렸는데...그 마음을 모두에게 들켜버린 것 같아서 또 불편하다. 


사람이 왜 이렇게 못났을까. 


내일 가서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까. 

마음이 괴롭고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말하기엔 변명이 너무 궁색하다. 

이 나이 먹도록 밥벌이하면서 마음이 안 괴롭고 안 힘든 사람이 어딨나. 

내 능력이 안 돼서 못하겠다고 말하기엔 변명이 너무 (나에게) 처참하다. 

이런저런 궁리를 하는데 이 모든 생각을 한 방에 접게 만든 엄청난 위력의 메시지가 도착한다. 


띵똥! 

[입금되었습니다] 


아, 오늘이었구나. 그런데 예상보다 많은 돈이 입금되었다. 

설마..성과물은 없었지만 수고로움은 인정한다는 메시지인가? 

내일 가서 물어야 할 이야기고, 잘못 입금되었다면 내일 가서 내가 물어야 할 돈이다. 

아무튼...그리하여 조금 아주 조금 위로가 되었다. 

달걀찜이 주지 못하는 위로를 받고 나는 다짐한다. 


짤릴 때까지 내가 짜르지는 말자, 고.   

나는 나를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이고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나를 지켜야 하는 보호자니까. 


*사진의 그림은 숀 펜의 그림책 '빨간 나무'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그림책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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