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평 Sep 22. 2020

열두 살의 봄 1

그때 그 시절 넌 

그 녀석의 생일이 어제였구나. 

오늘이 9월 21일이니까. 그러고 보니 sns 알림에도 보였던 것 같은데, 눈여겨보지 않아 모르고 지나갔다. 

하긴 알았다고 해도 달라질 일이 뭐가 있겠나

축하 인사도 새삼스러운 나이, 우리는 (어느새) 30년 지기 친구다. 

알고 지낸 30년을 전부 살뜰히 서로 챙기며 지내진 않았지만 그래서 사는 형편을 속속들이 다 알지는 못하지만 

함께 보낸 10대의 그 몇 년이 우리의 관계를 붙들어주고 있다고 해야 할까. 

한때는 나의 졸렬함으로 '다시는 보지도 말고 연락도 하지 말자' '완벽한 타인' 운운하며 

유치한 절교 선언까지 했었지만 무엇이 계기였는지 지금은 안부를 묻고, 

각자가 사는 곳에 태풍이 지날 때나 큰비가 내릴 때 걱정은 하고 지내는 사이다. 

'괜찮냐? 별일 없고?'라고 물으면 '아직은. 괜찮다'라고 답하는 사이. 


그 녀석을 생각하면 어딘가 아릿한 마음이 든다. 

어디서든 잘 살았으면 좋겠고, 아프지 말았으면 좋겠고, 따뜻했으면 좋겠다는 

마치 피붙이에게 드는 마음처럼 그렇다. 

아마 함께 보낸 시간과 기억 그리고 그 녀석에게 바쳤던 내 마음 때문일 것이다. 

꽤나 유구한 그 녀석과 나의 역사는 1980년대 끄트머리 어느 여름날에서 시작되었다. 


열한 살 내 인생에 예고도 없이 훅, 치고 들어온 

나의 첫사랑.  


전학생 소식에 작은 시골 학교 교실이 들썩였다. 

녀석의 이름은 그 당시에 아니 지금도 그리 흔하진 않은 이름이다. 

발음하기 불편한, 입에 붙지 않는 이름, 그래서 이름 끝자만 부르게 된.  

'훈아' '윤아' '진아' '정아'처럼. 


도시에서 전학 온 녀석은 얼굴이 새하얗고 어딘가 기품이 있어 보였다. 

크지 않은 키와 체격에도 남자아이들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기운이 있었다. 

어쩐지 우리와는 '끕'이 달라 보였던. 

입버릇처럼 '우리 00에서는'이라고 말하는 게 때로 밉기도 했고, 저게 여기가 촌이라고 무시하나 싶기도 했고, 

오자마자 선생님들의 관심을 받는 게 화나기도 했고, 많은 여학생들의 관심을 받는 게 짜증 나기도 했지만 

이런 마음 뒤에는 그 녀석을 좋아하게 돼버린 나의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 


어떤 사람을 좋아하면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마음이 열등감이다.  

그게 짝사랑일 때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그때의 나는 못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녀석 앞에서는 한없이 쪼그라들었다.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란 노래 가사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녀석의 손목에 채워져 있던 '카시오' 전자시계가 왜 그리도 빛나 보였든지 

내 손목에 채워져 있던 만화 캐릭터 시계를 풀어버렸다.  


녀석은 공부를 곧잘 했다. 

1,2등을 다투던 나의 라이벌. 그때는 성적순으로 아이들을 앉혔는데, (그땐 그게 '폭력'이란 걸 몰랐다)  

그 녀석과 내가 나란히 1등과 2등이 되어야 짝꿍이 될 수 있었다. 

그걸 노린 나는 시험시간 커닝 조장도 불사했다. 

마지막 한 문제를 못 풀고 있는 녀석에게 버젓이 내 시험답안을 펼쳐주었지만, 그 답을 보고 썼는지 어쨌는지는 모른다. 내 기억에 나란히 1,2등이 되었지만 짝꿍이 되지 못했던 것 같다. 선생님의 마음이 바뀌었나, 1등과 꼴찌를 짝지어 앉히면서 나는 우리 반 꼴통과 짝꿍이 되었다. 

(내 맘대로) 빗나간 운명의 첫 번째 장이 넘어가던 순간,이었다.   

 

녀석은 축구를 좋아했고,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학교가 끝나면 학원엘 갔다. 요즘처럼 국영수 학원이 아니라 미술학원, 피아노 학원, 주산 학원 같은. 

주산학원 수업시간까지 틈이 나면 운동장 구석에 친구랑 앉아 녀석이 공 차는 걸 지켜보던 열세 살의 나. 

그 애타는 마음을 숨기고 나는 끝까지 친구라고 했지만, 다들 알지 않았을까. 그 녀석도. 

내가 그즈음 그 녀석의 마음을 어렴풋이 알았던 것처럼. 

    

한 동네였지만 나는 큰 길가에 있는 집에 살았고, 녀석의 집은 골목 안 깊숙한 곳에 있었다. 

녀석의 생일날, 초대받은 아이들은 우르르 몰려가 치킨과 각종 튀김과 콜라와 과자와 케이크를 먹으며 즐거웠고, 꼭, 반드시 '전기 놀이'를 했다. 

둥글게 모여 앉아 이불 아래로 손에 손을 맞잡고 전기만큼 짜릿함을 나누는 놀이.  

범인이 누구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내 옆에 누가 앉느냐가 중요했던 때, 녀석의 손을 잡는 일도 게임이니까 얼굴 붉어질 일은 없었다. 마음이야 수만 볼트 전기가 통한 듯 찌릿찌릿하고 어질어질했어도. 

 

녀석의 집에 우르르 몰려가 숙제를 한다는 핑계로 늦게까지 놀았던 기억도 있다. 

집으로 돌아올 때는 어둔 골목길을 지나야 했는데, 그때 울리던 텅텅텅 소리가 지금도 선명하다. 

내가 한 발을 뗄 때마다 울리던 텅, 텅. 텅. 무서움에 떨며 달리면서도 그때는 즐거웠다. 

지금에 와 드는 생각이지만 그 어둔 골목길을 왜 나 혼자 가게 둔 걸까? 


예상대로 그 무렵 녀석의 마음은 다른 데로 뻗어가고 있었다. 

우르르 몰려가 생일파티를 하고, 늦은 밤까지 숙제를 하던 그 무리 안의 한 여학생에게로.  




작가의 이전글 나를 먹여 살리는 일의 고단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