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든 꽃은 다시 심어 드릴 테니
"야, 이거 자꾸 시들어서 큰일이다."
집에 오니 오빠가 심각한 얼굴로 화분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사하던 날 엄마가 지인에게서 받아온 화분 중 하나였다. 코끝을 가져다 대면 레몬향이 사르르 부딪히는, 이름 모를 노란색 꽃. 처음 가져왔을 때는 꽃이 가득 핀 상태였는데 지금은 한쪽이 죽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시들어서 큰일이라는 오빠의 말에 대꾸 정도는 해줘야겠다 싶어, 언젠가 대학 교양으로 들었던 생활원예 수업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저 식물이 죽어가는 이유는… 물을 너무 많이 줘서? 아님 너무 적게 줘서? 우리 집에 해가 잘 안 들어서 그런가? 말하고 보니 교양 수업을 안 들어도 누구나 댈 법한 이유여서 조금 머쓱하긴 했다.
이미 죽어가는 걸 이제와 어떻게 살리겠냐, 싶었지만 오빠는 생각이 조금 달랐던 것 같다. 이튿날 방에서 나오니 거실에 있던 화분들이 몽땅 사라져 있었다. 그새 또 버렸나? 의아해하면서 막내에게 화분들의 행방을 묻자, 시큰둥한 대답이 돌아왔다.
"형이 아까 밖에다가 내놨어."
"왜?"
"밖에 비 온다고."
"그러니까 그게 왜?"
"비 맞으면 더 잘 자란대."
물음표 살인마인 누나의 질문에 충실히 대답해준 막내는 들고 있던 휴대폰에 코를 박았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꿍얼거렸다. 지극정성이야, 형은.
그다음 날, 늘 그랬듯 늦잠을 자던 나는 거실에서 들리는 요란한 소리에 잠에서 깼다. 출근할 시간에 출근 준비는 안 하고 오빠가 뭐라 뭐라 떠드는 게 들렸다. 막내 특유의 무뚝뚝하고도 성실한 대꾸까지 따라왔다. 방에서 나갈까 말까 고민하던 새, 오빠의 호들갑이 멎어들더니 이윽고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더 자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뜬금없는 소란의 이유가 너무도 궁금했던 나는 방문을 열어젖혔다. 늘 그랬듯 머리 위로 물음표를 그리면서.
"왜 저래? 아침부터."
또 늘 그랬듯 휴대폰을 하고 있던 동생은 무심한 대답을 돌려줬다. 주인집 아주머니가 화분에 뭐 하셨다고 그러던데. 내 머리 위로 물음표가 하나 더 추가되는 게 느껴졌다. 뭘 하셨는데?
"시든 거 솎아주시고 꽃도 새로 심어주셨어."
밤새 봄비를 맞은 화분들을 들여놓으려고 오빠와 동생이 움직이고 있을 때, 집주인 아주머니와 마주쳤다고 한다. 이미 아침 일찍 우리가 내놓은 화분들을 보시고 시들어가는 부분들을 솎아주셨다고 했다. 더불어 어떻게든 살려보겠다고 다른 곳에 따로 놔둔 노란 화분은, 직접 똑같은 꽃을 사 와서 심어주셨다고. 하얀색 꽃이 든 화분 하나를 얹어주시기까지 해서, 그에 감동한 오빠가 호들갑 떨던 소리가 아침 댓바람부터 내 잠을 깨웠던 것이다.
저녁에는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며 오빠가 퇴근길에 롤케이크를 하나 사들고 왔다. 거기에 작게 쪽지를 적어서 드리기로 했다. 물론 셋 중에 그나마 글씨다운 글씨를 쓰는 내가 적어야 했다. 쪽지와 롤케이크를 누가 전해드리냐로 아웅다웅했지만, 가장 안면이 있는 오빠가 가는 게 맞다는 나의 주장에 오빠가 2층으로 올라갔다. 현관문 밖으로 집주인 아주머니와 오빠가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로부터 한 시간쯤 후에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거실에 있던 오빠가 누구세요, 물어보니 조금 전에 뵌 집주인 아주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현관문을 여는 소리와 함께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금방 또 인사를 하고 올라가시기에 방에 있던 나는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왜 오셨대? 그러자 오빠가 대뜸 화분 하나를 보여주었다. 화분 주시고 가셨어, 메모랑.
"와아, 짱이다!"
노란 포스트잇 세장에 깨알 같은 글씨가 빼곡히 적혀있었다. 뭐야, 뭐야. 오빠랑 나는 같이 쪽지를 읽어보았다.
새벽에 꽃 보고 너무 귀엽다 생각했어요. 제가 죽은 거 뽑아버리고 다시 심어드리고 싶어서 한 거라…. 그리고 이왕이면 향 있는 것도 키워보라 하고 싶어서 놓아두게 되었네요.
그 아래로는 삼 남매가 귀여운 마음에 좋아서 한 일이니 따로 무언가를 안 챙겨주셔도 된다는 당부가 적혀있었고, 꽃이 또 필요하면 대문 밖에 있는 동백꽃 옆에 놓아두라는 말이 적혀있었다. 새로운 꽃으로 바꿔서 출입문 앞에 놓아두시겠다고. 그 사려 깊고 다정한 말에 오빠랑 나는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우리 진짜 좋은 이웃이랑 사는구나. 우리는 쪽지를 현관 신발장에 붙여두었다. 오고 가며 언제든지 볼 수 있도록.
그게 아마 한 달 전 일이었을 거다. 나는 그 사이에 본가에 내려갔다가, 3주 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와서 보니 한 달 전 주인아주머니께서 새로 심어주셨던 노란 꽃은 이미 시든 뒤였다. 이전에 시들었을 때보다 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결국 화분을 정리하다가, 문득 전에 적어주셨던 쪽지가 생각나 다시 읽어보았다. 쪽지 속에는 그런 말도 적혀있었다.
저도 잘 키워보려고 하는데 자꾸 죽어요. 그래서 전 맘 편히 죽으면 다시 구매하러 갑니다 ㅋㅋㅋ 스트레스받지 말고, 편하게 키우세요.
그 문장들을 곱씹으면서, 마음속에 있던 아쉬움을 시원하게 떨쳐낼 수 있었다. 아주머니의 말씀이 맞았다. 시들어갈 때는 죽은 걸 솎아주면 되고, 죽고 나면 다시 심으면 되는 일이었다. 잘 키워보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되, 안 되는 일에는 너무 스트레스받지 말라고. 또 한 번 시드는 꽃을 보며 상심할 우리를 위해 남긴 그 한마디가 너무도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꼭 그 말이 지금의 내 상황을 알고 어루만져주는 것 같기도 했다.
최근 들어 글쓰기에 대한 내 마음이 그랬다. 마치 시들어가는 화분을 보고 있는 듯한 그런 기분이 들었다. 전과 똑같이 햇빛이 내리는 창가에서, 전과 똑같이 물도 주고 마음도 주는데 꽃이 시들어갔다. 그러면 가만히 그 앞에 앉아서 생각하는 것이다. 왜 죽어가지? 물을 너무 많이 줘서? 너무 적게 줘서? 햇빛이 전보다 부족해서? 어떤 날은 물을 너무 많이 준 것 같단 생각에 조금 무심하게 방치했다가, 어떤 날은 물을 너무 조금 준 것 같단 생각에 콸콸 붓다가, 또 어떤 날은 창문을 활짝 열어 햇빛 좀 보라고 했다가, 그럼에도 왜 전처럼 싱그럽지 않은지에 대해 우울해했다. 죽은 부분은 과감히 솎아내 주고, 새로운 꽃을 심으면 된다는 걸 모르고.
그렇게 조금쯤은 내 안을 솎아줄 필요를 느꼈다. 그럼 그 자리는 영영 비워지는 자리가 아니라 새롭게 채워지는 자리가 되니까. 물론 그것 또한 언젠가는 시들 테지만, 그래도 너무 마음 아파하지 않기로 한다. 개화와 결실을 바라보며 행복했던 것만큼, 낙화의 과정까지도 사랑해준다면 화분은 계속해서 내 창가 위에 있을 테니 말이다. 새로운 푸르름, 눈부신 싱그러움으로.
모두의 마음 안에 있는 저마다의 화분들이 깨지거나 버려지지 않고 오래 함께하기를 바란다. 혹 이미 그 안에 있는 꽃이 시들어버렸다면, 대문 밖 동백꽃 옆에 살며시 화분을 놓아두자. 그러면 또 새로운 꽃이 심어진 채로 그 마음의 출입문 앞에 놓아질 테니까. 나는 며칠쯤 화분 안을 정리한 끝에 마침내 새로운 꽃을 들여놓게 되었다. 언젠가 당신의 대문 밖에 놓을만한 붉은 동백꽃으로 잘 키워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