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외로움에 대한 기억
작년 1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나의 임용시험 1차 합격 소식을 들은 후 보름째 되는 날이었다. 2차 시험 준비를 해야 했기에, 아니 그게 아니어도 남은 사람들을 생각해야 했기에 나는 슬픔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1년도 더 지나서, 나의 침전된 그리움을 건져 올려 이제는 꿈에 자주 나오지도 않는 그를 온전히 추억해보려 한다.
그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가진 게 없었고, 나름의 노력을 했지만 일은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 사업을 했지만 그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이발소나 호프집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어렵지 않게 말을 건네는 모습을 보며 그의 붙임성에 감탄하였던 나는, 그것이 사회의 요구에 학습된 결과물이자 외로움의 발로였음을 알기엔 너무 어렸다. 그가 보험회사 영업사원 연수를 받고 와서 자신이 발표하다가 긴장해서 얼마나 말을 더듬었는지, 교사를 하는 아들에게 너는 어떻게 그런 일을 하는지 궁금하다고 쑥스러워하며 털어놓을 때가 되어서야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내가 몰랐을 뿐 그 스스로는 충분히 알고도 남을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샐러리맨으로서의 삶을 너무 괴로워했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잘하려고 했고, 자존심이 강했으며, 과한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사장이 되면 자신이 모든 것들을 짊어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니 어차피 괴로울 거 그만큼의 정당한 몫을 죄책감 없이 가져가고자 했을 거라고 추측해 본다. 그러나 그가 감당한 무게를 저울에 올렸을 때 우리는 값을 치러주지 않았다. 그때의 우리가 필요한 건 돈이나 애정 어린 관심과 같이 달콤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도 우리가 필요로 했던 것을 원했음을, 다만 그것을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어 그저 그가 가진 철학이나 뚝심 따위의 것들을 내놓아 평가받을 수밖에 없었음을 우리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많이 외로웠다.
그가 얼마나 일을 열심히 했는지, 잘했는지, 운이 없었던 건지 나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가 항상 치열하게 자신의 현실과 드잡이 하였음은 분명하다. 그는 아들이 부르는 노래 한곡이 듣고 싶다고 노래방에 가서는 거래처의 전화 한통에 노래방 시간이 다 끝나도록 들어오지 못하며 아쉬워했고, 만취해서 대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현관에 드러누워서는 연신 그저 미안하다며 울먹였으며, 사업이 망한 다음에는 참치캔에 고춧가루 뿌린 것을 안주삼아 아무 말 없이 소주를 마시다가, 기어코 다시 문 밖으로 나가 아쉬운 소리를 하며 보험 영업을 해냈다.
그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그의 인생 내내 가시덤불로 포장된 외길을 꿋꿋이 상처 입으며 걷는 것 외에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나 역시 나이가 들어 이제는 내가 기억하기 시작하는 그의 나이로 살고 있지만, 나는 겨우 그의 희생으로 나에게 주어진 샛길들을 찾아 운신할 뿐이다. 하루하루 도망칠 기회를 좇는 나에게 그처럼 다른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아 오롯이 그가 걷던 그 길들을 걸어야만 했다면, 나는 그처럼 묵묵하게 나아갈 수 있었을까? 그래서 그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감히 나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아버지가 참치캔에 소주를 마실 때 순댓국을 사드리며 술친구는 해줄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후회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