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에서 밀, 다시 밀에서 쌀로
"언니는 쌀떡파예요 밀떡파예요?"
같은 대학원에서 사회 인류학을 전공하고 있는 동생이 물었다.
"음.. 난 생각해 본 적이 없네. 한국 밖에서 산지 너무 오래됐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단 메뉴에 떡볶이가 보이면 반가운 정도?"
그러고 보니 런던의 한국 상점에서 다양한 떡볶이 제품을 보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요즘 떡볶이는 런던 한국 식당들의 필수 메뉴인 듯하고 중국, 일본 마켓에서까지 여러 종류의 소스, 떡, 즉석 컵 제품을 팔고 있으니, 과장해서 떡볶이가 한류를 가늠하는 바로미터 되겠다.
다시, 쌀 떡볶이? 밀 떡볶이?
'떡'은 rice cake, '볶이'는 'stir-fry'.
맞다, 떡을 소고기, 버섯 등과 기름에 볶아 간장 양념을 한 궁중 떡볶이가 시초이지.
떡 앞에 다시 밀 또는 쌀을 붙인다니 재미있네.
이쯤 해서 떡볶이의 탄생, 유래, 고추장, 밀가루 떡볶이 등장이 제대로 궁금해진다.
찾아보니 한국식품연구원의 2013년 자료 '한국의 전통음식 떡볶이 - 궁중음식. 양반음식. 서민음식. 글로벌 음식'에서 상세히 다루고 있다.
겸암집(1595년 유운룡 저)에서 부터 1950년 대 근대 문헌 자료를 통해 간장 베이스의 떡과 부재료의 볶음 조리법이 떡볶이의 오랜 모습이었음을 보여 준다. 1936년 동아일보의 '떡볶이 재료 및 영양 성분' 표를 보는 것도 흥미롭다. 떡, 소고기, 간장에 표고, 미나리, 석이, 파, 참기름 등 재료 목록이 다채롭다. 소고기 대신 전복, 해삼, 돼지고기 등과 떡볶음 요리를 만들었다고도 하니 궁중과 양반 사이에 즐기던 고급 음식임에 틀임 없구나 짐작해 본다.
그렇다면 내가 8-90년대 즐겨 먹었던 고추장 밀가루 떡볶이의 유래는?
"1950년대 서민들의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탄생했다는 고추장 떡볶이는 마복림 할머니가 중국음식점에서 가래떡을 실수로 자장면 그릇에 떨어뜨린 것을 아이디어로 착안, 밀가루 떡에 고 추장을 버무려 노점에 팔기 시작했다는 설이다" (p156)
한국식품연구원 자료 말미에 간략하게나마 보편적으로 알려진 위의 설에 무게를 실어 준다.
중학생 시절 하교길에 이틀이 멀다 하고 찾았던 떡볶이 집이 있다. 아주 작은 포장마차에 딱 떡볶이 하고 오뎅(어묵)만 팔았다. 당연히 간판도 없었던 그곳을 우리는 '뚱땡이 아줌마 떡볶이'라고 불렀다. 인상은 약간 험했고 풍채는 너무 좋았던 뚱땡이 아줌마, 올빽 머리에 큰 나무 주걱으로 커다란 떡볶이 판을 저으며 '왔어?' 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 하다. 단골이라고 가끔 어묵 한 조각을 더 주던 아줌마의 달고, 짜고, 매웠던 떡볶이 맛은 더 생생 하다.
한국 전쟁 이후 먹을 것이 부족했고 쌀이 귀했던 시절, 쌀 대신 밀가루로 만든 떡볶이가 널리 퍼진 데에는 주요 원동력이 있다. 1954년 미국이 자국 내 잉여농산물에 대한 국제무역 및 개발 원조 관련 법을 발효하면서 한국, 일본, 타이완과 같은 제3국을 대상으로 펼친 식량원조프로그램 (the US Food Aid program)이 그것이다. 우리나라에도 1960년대 미국의 밀가루가 대량으로 수입되면서 정부가 앞장서 쌀과 보리, 콩 등을 섞어먹는 혼식과 밀가루 중심의 분식을 장려하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시행되었으니 밀가루 떡볶이의 출현도 이와 연결된다 하겠다. (방망이 만한 밀가루 빵 속에 새끼손가락만 한 분홍 소시지가 들어있던 핫도그도)
떡볶이 관련 자료를 찾아보다 2009년 출범한 한국쌀가공식품협회 부속기관인 '떡볶이 연구소' 존재를 알게 되었다. 영국 런던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쉽게 먹을 수 있는 떡볶이가 되기까지 숨은 조력자들의 역할이 상당했음을 느낀다. 떡볶이 연구소의 설립 배경과 연구 활동에 관한 정보를 찾을수록 세계화된 떡볶이를 떠올리며 고개가 끄덕여진다. 식생활 변화로 쌀 생산량에 비해 소비는 부족한 21세기 대한민국, 쌀 소비량 및 수출 증대를 위해 우리의 떡볶이가 무한 변신을 거듭하며 앞장서고 있는 것이었다.
쌀떡에서 밀떡으로, 밀떡에서 다시 쌀떡으로.
그러고 보니 과거의 나는 밀떡파였고 지금의 나는 쌀떡파이다.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시대와 사회가 결정해 준 선택이다.
앗,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뚱땡이 아줌마의 밀가루 떡볶이 맛이 갑자기 그리워진다.
오늘은 추억 소환을 위한 밀떡파가 되어야겠다. 오롯한 나의 선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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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한국식품연구원 (2013). '한국의 전통음식 떡볶이 - 궁중음식. 양반음식. 서민음식. 글로벌 음식', 식품문화 한맛한얼, 6권 2호, 110-158. http://www.koreascience.or.kr/article/JAKO201367958869502.pdf
- 이상효(2010). 한국전통 떡볶이의 세계화 전략. 서울국제식품산업대전 산업 심포지움, 한국 식품영양학회, 1-54.
- Kim, Kwang Ok (2015) ‘Rice Cuisine and Cultural Practice in Contemporary Korean Dietary Life’, in Kwang Ok Kim (ed.) Re-orienting Cuisine: East Asian Foodways in the Twenty-First Century. New York: Berghahn, 71-90.
- 코리아중앙데일리 영문, 2009년 3월 19일 자 Can tteokbokki rescue rice industry? https://koreajoongangdaily.joins.com/2009/03/19/features/Can-tteokbokki-rescue-rice-industry/290241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