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서치 >
존 조 주연의 영화 <서치 searching>을 브런치 시사회를 통해서 봤다. 영화 서치는 어느 날 스터디를 하러 갔다고 하고 사라진 마고 킴을 추적하는 그녀의 아버지 데이비드 킴(존 조)의 이야기이다.
이 영화가 공개되고 나서 특이한 연출로 주목을 받았다. 이 영화의 화면은 모두 모니터 화면이다. 다시 말해 데이비드 킴이 혹은 다른 인물이 사용하고 있는 화면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배우들의 얼굴과 모든 사실들은 컴퓨터를 통해 매개된다. 통상적으로 영화에서 카메라는 관객의 눈을 대신한다. 그 눈은 어느 것도 통하지 않고 배우를 향한다. 그러나 서치에서는 모든 시선은 시야는 무언가를 매개로 해서 작동한다. 어떤 때는 컴퓨터 화면이고, 어떤 때는 시시티브이다. 이는 실생활의 우리가 겪고 유지하고 있는 관계의 전부가 매개되고 있음을 은유하고 있다. 우리의 관계는 소셜 미디어, 인터넷 생방송, 인터넷 뉴스, 메시지, 영상 통화 등으로 매개되어 이어져있다. 나와 친구는 직접 만나 이야기하는 시간 보다, 전화를 하거나 메시지를 보내고 각자의 소셜 미디어 계정에 좋아요와 댓글과 하트를 눌러주는 시간이 더 길다. 이 일들은 매개 없이 만나는 순간보다 우리 둘 사이의 관계에서 더 중심적이다. (사실 직접 만나는 이야기 하는 것도 언어를 매개로 이루어지지만)
매개된 것들을 통해 서로를 아는 우리는 서로를 매개된 모습으로만 안다. 매개된 모습은 무엇이 만들어낸 모습인가. 매개하는 미디어가 미디어의 특성에 맞게 비틀거나. 혹은 미디어를 통해 전달하는 상대가 미디어를 통해 비튼 것이다. 매개한다고 할 때 이 말에는 무엇을 매개할 것인가와 매개하지 않을 것인가를 선택한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매개된 모습으로 서로를 안다고 말하지만 결국 상대가 매개하지 않는 모습은 모른다. 과거에 비해서 매개 수단이 늘어나고 매개의 빈도도 늘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매개된 횟수만큼 그 수단만큼 비틀리고 갈라진다. 나는 매일 만나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페이스 북이 아니면 모르고, 네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트위터가 아니면 모르고 네가 어디를 다녀왔는지 무엇을 샀는지 인스타그램이 아니면 모른다. 그리고 내가 이런 것들을 모른다는 것을 그것들을 보지 않으면 모른다.
매개되지 못한 관계는 껍데기가 된다. 아내를 잃고 슬픔을 견디며 살아가는 데이비드 킴은 딸에게 쓰레기 처리 문제로 경고하고 그녀가 좋아하는 피아노를 계속 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자신의 가족을 걱정하는 이들에게 자신들은 괜찮다고 말한다. 그러나 마고 킴이 사라지고 나서야 데이비드 킴은 자신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짤막한 영상통화와 몇 가지 문자 메시지는 서로에게 자신에 대해서 어떤 것도 전달하지 않았다. 이 절망과 후회를 하나씩 마주하면서 추적하며 데이비드 킴은 딸이 남긴 미디어(블로그, 페이스북, 인터넷 생방송 채널)를 통해서 딸을 구축한다. 이를 통해 매일 직접 만나던 때보다 오히려 딸을 보지 못한 시간 딸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 이 이야기는 매개되지 못한 사람들이 매개되는 이야기이다.
이 과정을 영화는 전통적인 추리 장르의 문법과 연출로 잘 보여준다. 관객들로 하여금 긴장감을 놓지 않게 하고, 계속 궁금하게 하며 계속 질문을 던지게 한다. 관객으로서 러닝타임 내내 즐거웠다. 사실 컴퓨터 화면으로만 이루어진 영화라는 설명을 듣고 좀 답답하거나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런 생각은 불필요한 생각이었다. 이런 체험은 전적으로 추리 장르로서도 그리고 서스팬스로서도 잘 조직된 연출 덕분이다.
그리고 한국계 가족이 주인공으로 나온다는 사실이 좋았다. 주인공으로 나오면서도 이 가정은 기존의 할리우드 영화에서 처럼 폭력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존 조가 직접 한국계 가족이 화목하게 그려 저서 좋았다고 언급한 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