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프롤로그

by SseuN 쓴
막걸리 병과 잔(2개)을 그린 이미지.png

-왜 나는 막걸리는 찾게 되었는가-


이젠 마음의 한편에 작은 상자에 담겨 먼지가 쌓일 정도로 많은 시간이 지난 할머니 이야기다.

할머니는 내가 어릴 때부터 우리 집에서 나와 내 동생을 돌봐주셨다. 나의 복잡했던 가정사는 다음에 이야기하는 걸로 하고, 딸의 아이를 키워주기 위해 사위 눈치를 볼 수밖에 없던 할머니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한다.


할머니는 당찬 분이셨다.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빈자리를 당신 스스로 책임지지 않으면 육 남매를 키워 낼 수 없었기에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손이 거친 분이셨다. 육신이 고된 일은 아이들이 모두 결혼을 하고 나서야 그만 두실 수 있었지만 육 남매 중 가장 살림이 어려웠던 넷째 딸네 집에 계시면서 다시금 육신이 고된 일인 파지를 주우러 다니셨다.


본인은 집에 있으면 심심해서 놀기 삼아 나가신다고 하셨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나도 힘들 정도의 양을 싣고 다니셨으니 오죽 고된 노동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시절엔 누구나 다 그렇게 살았다고 하지만 유독 우리 집이 더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더운 여름이면 할머니는 일을 나가시지 않으셨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라 뭘 좀 안다고 '일사병'이니 '탈수증'이니 할머니께 투덜거렸더니 여름엔 잘 나가지 않으셨다. 온 동네 어른들은 우리가 학교를 갔다가 오면 할머니의 위치를 알려주셨다. 그럼 우리가 한 짐을 싣고 계신 할머니를 찾아 나섰고 우리가 공부하는 동안 모아 둔 파지나 고물들을 고물상에 내다 팔고 집에 들어왔다.


상황을 묘사하긴 했지만 난 그렇게 효손이 아니었다. 그저 할머니가 보이면 갔었고, 안 보이면 나가 볼 생각도 안 했다. 할머니도 뭘 그렇게 잘못을 하셨다고, 내가 밖에서 보여도 아는 채도 안 하셨다. (이대목에선 늘 눈물이 난다)


집 앞, 작은 슈퍼는 할머니가 반드시 지나와야 하는 길목에 있었다. 어릴 적 집에 아무도 없으면 외상으로 과자를 사 먹고 저녁에 부모님이 돈을 가져다줄 정도로 가깝게 지내는 슈퍼였다. 그 슈퍼 평상에서 늘 할머니는 막걸리를 한 잔씩 드시고 집에 들어오셨다. 매일 술잔을 받아주는 이들이 달라지긴 했지만 할머니는 거기에 앉아 늘 막걸리 한잔을 하고 오셨다. 할머니는 그렇게 딱 한잔의 막걸리로 노동의 고통을 덜어내는 진통제를 마시고 들어오셨다.


생각하며 쓰다보니 마치 얼마 안 된 일처럼 생생한 그 모습이 벌써 20년이라는 시간을 넘겼다. 아득하고도 먼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그러다 우연히 막걸리를 마시는 할머니가 생각나 막걸리를 샀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손자가 그토록 귀했는지 뒤에서 리어카를 끄는 일을 기어코 혼자서 해내셨다. 막걸리가 입에서 넘쳐 흘러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다.



막걸리는 누군가의 밥이자 식사였고, 든든한 에너지 드링크와 같았고 더운 날 시원한 생수와도 같았다. 시대적으로 막걸리가 모진 시간을 겪긴 했지만 잔치자리에 빠지지 않았고, 장례식엔 끝까지 자리를 지켜주던 손님이었다. 괜히 낮에 술 한잔 먹고 싶을 땐 소주보단 막걸리 한 잔이 좋았고, 대학교 잔디밭 낭만은 막걸리에서부터 시작했었다. 그런 것들이 낭만이었다.


다시 막걸리를 한 잔 들고 하얀 물결을 바라보고 있으니 문득 궁금해졌다. 어떻게 하얀 술이 만들어지는 걸까? 어떻게 맛을 내는 걸까? 할머니에게 힘이 되어주던 막걸리는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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