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기억

도무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

by SseuN 쓴

외로움을 즐기고 싶은 날엔 숙소에서 한 번도 나가지 않은 편이다. 여행지를 방문하기 전에 세운 계획에는 볼거리와 먹을거리에 일정이 빡빡하지만, 불현듯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이 들면 나는 그대로 멈추는 편이다. 눈을 뜨고 화장실을 다녀온 뒤에 다시 방으로 들어와 밤 새 구겨진 시트를 손바닥으로 대충 다시 다림질을 해 본다. 목이 마르다면 이불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수분 보충도 충분히 해 둔다. 물은 주로 사 먹지만 언제 샀는지 기억에 가물거리는 물통을 열어 그 속에 물을 마신다.


밤 새 생긴 갈증을 해결했다면 다시금 시트 위에 엉덩이를 밀어 넣고 발 밑에 있는 이불을 발가락 사이에 걸어 올린다. 숙소의 온도는 항상 비슷하게 유지가 된다. 약간 서늘한 온도의 숙소는 이불속이 알맞은 온도이다. 딱히 핸드폰을 들고 들어가지 않는다. 괜히 핸드폰을 들고 있으면 거기에 빠져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불속에서 눅진한 기분을 즐기고 싶었다.


눈을 감아도 잠이 드는 건 아니지만 눈을 뜨고 있으면 자꾸 밖으로 나가고 싶어지는 마음이 들 수 있다. 애써 신경을 끄기 위해 이불을 조금 더 위로 올리고 눈을 감아버린다. 오랜 시간 눈을 감고 있다가 보면 가끔 짧은 순간 잠이 들기도 한다. 다시 깨고 잠들고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어 버린다. 점심도 혼자 먹으면 되기 때문에 밖에서 먹지 않는다. 숙소에서 간단하게 냉장고를 열어 어제 먹다가 남은 미역국을 데워 먹는다.


한인 마켓이 있는 곳에 도착을 하면 다음 행선지를 떠 올려본다. 그리곤 내 기준에 적합하다 싶으면 미역을 한 봉지 집어 든다. 나는 미역국을 좋아하는 편이다. 여행에서 미역은 가벼우면서 부피를 차지하지 않은 좋은 한식 재료가 된다. 심지어 끓여 먹기 쉬운 음식이라 들고 다니기 적합한 음식이다. 소고기를 넣으면 소고기 미역국이 되고, 참치를 넣으면 참치 미역국이 된다. 혹시 바닷가에 있다면 새우 미역국을 끓여 먹기도 한다. 미역국은 된장찌개처럼 냄새가 심하지 않아서 외국인들과 생활하는 숙소에서도 무리 없이 끓여 먹을 수 있는 좋은 재료이다.


전날 끓인 미역국은 차갑게 식어 냉장고에 들어 있지만 금세 데워진다. 찬 밥을 말면 끓는점에 있던 국의 온도가 뚝하고 떨어지면서 입에 넣기 알맞은 온도로 바뀐다. 적당히 식어 먹기 좋은 미역국을 한 입 넣고 씹고 있으면 외국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소고가 싼 곳이라 미역국엔 고기반 미역반이다. 피클 하나 집어 먹으면 입안이 깔끔해지면서 다시 숟가락에 한가득 담아 입에 넣기 쉽다.


배를 채우면 그릇은 씻어 두고 숙소 거실로 나온다. 손에 든 따뜻한 커피 한 장 정도는 침대가 아닌 곳에서 마시고 싶어서 손에 잔을 들고 밖으로 나와 본다. 여행지의 숙소가 그러하듯 사람들은 관광지를 향하거나 쇼핑을 위해 숙소를 비우고 나갔다. 이들의 빈자리를 청소하는 사람만 남아 묵묵히 일을 하고 있다. 빈자리를 치우기도 하고 있는 자리를 정리하기도 한다. 그들이 내는 이불 터는 소리만 숙소에 가득하다.


청소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다시 방으로 들어가기를 포기했다. 그냥 들고 있던 잔에 남은 커피를 싱크에 쏟아버리고 겉 옷과 지갑 하나만 들고 밖으로 나왔다. 계획은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이었는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밖으로 나온 나는 아까 마시다 만 커피가 생각나서 작은 카페로 들어가 커피를 한잔 주문하고 밖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점심시간 정도라 사람들이 많이 다녔고, 직장에서 나온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무리도 많이 보였다. 편한 바지에 늘어난 티셔츠 하나 입고 슬리퍼 신고 나온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나를 신경 쓰는 이가 없었다. 물론 외국인이라 더 그렇겠지만 모두들 각자의 이야기로 바쁜 모습이었다.


커피는 부엌에서 만든 인스턴트보다 쓴 맛이었다. 어쩌면 지금의 상황이 쓴 맛일지도 모르겠다. 오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이유. 어제 열심히 블로그 작업을 하고 노트북을 들고 자러 들어가는 길에 외장하드를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그냥 덜어진 것도 아니고, 딱딱한 타일 바닥에 아주 부서질 정도의 세기로 떨어졌다. 당연히 노트북에 연결했지만 인식 불가. 한국에 수리를 보내기로 마음을 먹고 그냥 가방에 쑤셔 넣어버렸다.


속이 쓰린 정도가 아니다.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여행 중에 많은 위기를 겪은 것 같지만 이것보다 약한 것 같다. 아마 여행을 잃어버린 것 같은 충격이다. 다행스럽게도 사진은 같이 여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백업이 되어 있지만 내손에 사진이 없다는 것이 제일 속이 상하는 일이다. 여행의 기록이 날아갔다. 나의 기록 대부분이다. 내 손에 다이어리엔 그날의 느낌과 감정이 적혀 있을 뿐 장면이 담겨 있지 않다. 블로그에 사진이 있긴 하지만 현지 상황이 어려워 많은 사진을 올리지 못한 것도 많이 있다. 그러다 보니 사진이 몇 장 남아 있지 않다.


사진을 찍는다는 생각에 눈으로 담아내지 못했던 지난 여행을 돌아봤다. 후회가 남는다. 사진 하나 잘 찍기 위해 지나는 풍경을 그냥 스친 것이 떠 올렸다. 아쉬움만 계속해서 쌓여간다. 컵의 바닥에 커피 찌꺼기가 보일 때쯤 일어났다. 쓰린 속은 커피 때문만은 아닐 터. 발이 닿은 곳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하지만 오늘은 사진을 찍지 않을 것이다. 뭐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나에게 스스로 내리는 벌이다. 하루는 그냥 셔터 누르는 일 없이 눈에 담아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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