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에세이/일기/독서록
며칠 전 크로커스(꽃 이름을 우연히 알고 이뻐서 충동구매한...) 2개를 사서 새로운 화분에 옮겨 심었다. 둘 다 시들시들하기에 햇볕 좀 보라고 창가에 옮겨 놓았다.
화분 두 개를 옮길 때 옆에 있던 꽃망울 하나 달린 호접란 화분도 (내가) 같이 창가에 옮겨 두었다. 나의 며칠 전 기억에 의하면 그렇다.
그런데, 우리 집 짝꿍은 (자신이) 호접란 화분을 옮겨 놓았다고 말한다.
누가 호접란 화분을 옮겼는지 둘 중 한 사람의 기억이 잘못된 것이 분명한데...
내가 아무래도 잘못 기억한 것 같다고 생각하며 꼬리를 슬며시 내렸다.
누가 화분을 옮겼는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화분 셋 다 햇볕 잘 받고 잘 크면 되는 것이니까.
그런데, 불과 며칠 전의 기억인데, 왜 벌써 기억에 오류가 생겼을까.
얼마 전 김수영의 Rainy Day라는 곡을 들었는데 듣자마자 어떤 곡이 떠올랐다.
요즘은 음악을 듣는 스트리밍 앱이 있어 가사를 조금만 알아도 손쉽게 곡 제목을 찾을 수 있는데, 그 곡은 외국 여자가수라는 것 말고는 가사도 전혀 모르고 아는 것이 전혀 없다.
내 귓가에 멜로디는 수없이 맴돌고 있는데, 알아낼 수가 없으니 너무 답답하다.
언제 들었던 곡일까. 들을 때 어떤 추억이 있었나. 짚어보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칠흑과 같이 어두운 ‘기억’이라는 공간 저편에 이리저리 투망을 던져 보고 끌어올린다.
찾고 싶은 기억의 조각, 조각이 어디선가 길을 잃고 돌아다녀 잡히지를 않는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아기였던(몇 살인지는 모를) 몇십 년 전의 기억이 정말 거짓말처럼 떠올랐다.
어릴 적 기억을 자꾸 떠올리는 것이 치매 초기 증상이라는 말도 있던데...
한동안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하여 발작처럼 일어난 뇌의 이상 현상인 건가?!
이상하고 신기하다.
할머니는 나를 포대기로 업어서 재우려고 뭔가 부드럽게 흥얼거리고 있었다.
해질 무렵 나는 졸렸는지 할머니 등에 얼굴을 비비고 있었다.
우리 집은 조그만 시골에 있었는데, 아랫집 근처 조그만 우물과 낮은 소나무가 있는 길가 모퉁이에서였다.
할머니가 입고 계시던 카디건은 아마도 짙은 고동색 체크무늬였을 것 같다.
카디건 무늬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할머니 등에다가 귀를 대었다.
할머니의 흥얼흥얼 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쿵. 쾅. 쿵. 쾅! 심장소리가 커다랗게 들렸다!
(물론 아기였던 나는 그것이 심장소리라는 것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귀를 등에서 떼면 할머니의 목소리가 종전과 다르게 들렸다. 심장소리는 아예 들리지 않았다.
귀를 등에 댈 때 들리는 할머니의 목소리는 커다란 통속에서 말하는 것처럼 울림이 있었다. 다시 귀를 등에서 떼면 그런 울림이 없다.
할머니는 나를 재우려고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고, 내 엉덩이를 토닥이곤 했다.
뭔가 반복되면서 운율이 있는 목소리였고, 나는 점점 몽롱해졌다.
잠이 드는 느낌은 무언가에 빨려드는 이상한 느낌이었고 그것이 너무 싫었다.
나는 거기서 벗어나려고(잠들지 않으려고) 몸부림치곤 했지만 끝내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
거짓말처럼 분명하게 떠오른 나의 최초의 기억이다.
큰 아이를 낳고서 유독 잠투정이 심했던 큰 아이를 재울 때마다 너무 고생을 했다.
졸리면 그냥 잠들면 될 텐데, 애기가 잠투정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그런데, 얼마 전 이 기억이 떠오르자 아기들이 왜 잠투정을 하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큰 아이도 그랬던 것일까. 잠들기 직전 무언가에 빨려드는 듯한 그런 이상한 느낌이 나처럼 싫었던 것일까.
<오! 수정>이라는 영화가 떠오른다.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같은 서사가 남자(재훈)의 기억과 여자(수정)의 기억에 따라 다르게 구성되어 같은 장면이 반복되는 것 같은데도 미묘하게 다르다.
기억은 사람에 따라 달라지고, 어쩌면 똑같은 사람일지라도 그날의 기분과 감정에 따라, 그리고 상대방에 따라 다르게 기억되기도 한다.
어떤 것에 대한 기억과 누군가에 대한 추억들이 또 다른 누군가에 의한 기억으로 되새김질되며, 그때마다 그 장면은 다르게 각색되어 연출된다.
그러고 보면, 기억의 세계는 참으로 오묘하고 재미있다.
망각은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라고 한다.
망각, 무엇인가를 잊어버리는 것은 공격과 상처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뇌가 작동하는 장치일 수도 있다.
모든 것을 다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중요한 부분만 남기고 그렇게 잊어버리게 된다.
기억해야 할 것이 많아 지치는 이 복잡한 세상에 종종 잊어버리는 것이 있더라도 괜찮다고 스스로 위로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