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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번역가 권서경 Feb 05. 2021

미디어 속 홍일점 여성들의 이야기, 요술봉과 분홍 제복

역자 후기에 미처 담지 못한 말들

내 어릴 적 꿈은 만화가였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아주 좋아했고, 당시 만화 시장은 일본이 대세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내가 즐겨보는 만화는 필연적으로 일본 작품이 대다수였다.
유치원 다니던 시절에는 <세일러 문>과 <웨딩피치>를 참 좋아했는데, 티비 앞에 앉아서 설레는 마음으로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던 저녁 시간이 어제 일처럼 기억에 선명하다. 언젠가는 말하는 검은 고양이나 동그란 요정 같은 것이 내게도 찾아올 거라 굳게 믿으며 꿈을 품고 살았다.

미취학 아동 시절 이야기니 귀여운 착각이라며 웃어넘길 만 하지만, 청소년이 되고 난 후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집 근처 만화책방을 집처럼 들락거리며 온갖 순정만화를 섭렵하면서, 애타게 기다리는 대상이 '말하는 고양이'에서 '키 크고 잘생긴 남자'로 옮겨갔을 뿐, 꿈을 꾸는 데에는 게으름이 없었다.
이걸 한결같다고 말해도 될지. 스무 살을 넘겨 성인이 되어도 그 누군가에 대한 '기다림'은 여전했으니 지칠 줄 모르는 끈기만큼은 인정해주어도 괜찮겠다.

그런 나에게 『요술봉과 분홍 제복』(사실 아직까지도 원제인 『홍일점론』이 더 익숙하긴 하다)은 특별했다. 언제나 '주체적으로' 적에게 맞서는 세일러문인데, 엉덩이를 겨우 가리는 그 짧은 치마가 휘날릴 때마다 왜 내가 다 마음 졸이며 지켜봐야 했는지, 날카롭고 화려한 손톱에 시쳇말로 '센 언니' 화장을 하고, 저 좋을 대로 남자 부하들을 거느리는 악의 여왕을 보고도 왜 차마 순수한 쾌재를 부르지 못했었는지.
페미니즘을 알고 난 후에도 좀처럼 정리되지 않았던 모순들이 하나 둘, 단단히 묶인 매듭 풀리듯 헤쳐질 때의 쾌감이란.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이 책을 번역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거창한 의도나 계획이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이런 신통한 해답을 혼자만 알고 있다는 건 가히 이기였다.
하지만 번역이라고 해 봤자 급식 먹을 시절 온라인에 떠돌아다니는 일본 영상에 조잡한 자막이나 달아본 게 전부였던 내게, 번역가로서의 입지 같은 게 있을 리가 만무했다.
인터넷과 관련 서적을 뒤져 어찌어찌 기획서라는 걸 써 보긴 했는데, 이게 맞는 건지 어떤 건지 첨삭을 부탁할만한 선배도 없었으니 지금 다시 보면 정말 날 것 그대로의 글이었다.
사람들 말로는 이걸 출판사에 보내서 채택이 되면 번역을 할 수 있다는데, 내가 생각해도 답변이 올 확률은 바닥을 찍었으니 닥치는 대로 출판사 수십여 곳에 메일을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역시나 답변을 준 출판사는 한 손에 꼽았지만 굴하지 않고 다시 크고 작은 출판사 수십 곳의 문을 두드렸다.
지금 생각하면 앞뒤 생각 않는 무모함 그 자체였다. 스물대여섯 무렵의 일이니 치기 어린 패기였다고 얼버무려나 볼 수 있어 다행이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 운 좋게도 대형 출판사에서 책을 내겠다 답변이 왔을 땐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당시 경력이라고는 번역서 한 권이 전부였고, 그나마도 썩 봐줄 만한 실력은 아니었기에 이후의 과정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지만, 많은 분들의 도움에 힘입어 어쨌든 지금은 내 이름 석자가 인쇄된 번역서로 출간되었으니 오랜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달성된 셈이다.
역서가 출간되고 가장 뿌듯한 건 역시 독자 후기를 발견했을 때다. 재미있다, 충격적이다, 통쾌하다, 나와 같은 감상을 말하고 공감하는 이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국내에 저자의 전작이 두 권 번역되어 이미 알만한 사람은 아는 작가였고, 덕분에 그 이름만 보고도 새로운 번역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역시 내심 뿌듯했다. 같은 대상을 덕질하는 사람을 발견했을 때의 반가움이라 하면 많은 이들이 공감하지 않을까?

구구절절 서론이 길었다. 다 제치고 결론을 말하자면, 정말 큰 애정과 자부심을 가지고 옮긴 책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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