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의 외곽, 도심에서 조금 벗어난 한적한 마을, 할머니 집은 뒤편으로 산새가 우거진 논밭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고, 사계절이 마치 색채로 대화를 나누는 듯한 곳이었다.
여름이 되면 벼가 자라고 초록빛이 깊어지면 마당은 생기로 가득 찼다.
벼가 고개를 숙일 무렵이면 바람결에 가을의 정취가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할머니 집에 갈 때면 시장에 들러 두부 한 모와 꼬마김밥을 챙기는 건 마치 의식 같았다.
특히 꼬마김밥을 무척 좋아하셨다. 내가 기억하는 이날은 특별한 날이었는데 천안 오일장이 열리는 날이었다.
농산물을 팔며 서민의 정을 나누는 오일장 날이면, 나에게 꼭 어떤 부탁을 하셨다.
"들기름, 두부한모!"
방앗간에서 갓 짠 들기름과 오일장에서 볼 수 있는 따끈한 두부를 무척 좋아하셨다.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무려 동물 심부름이었다.
할머니는 내 손에 오만 원을 쥐여주셨다.
"토끼 하나, 그리고 염소 한 마리 사와" 시장 가방을 들고 오일장으로 향했다.
이걸로 될까? 걱정이 앞섰지만 시장 마감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걸음을 서둘렀다.
오일장은 정말 온갖 것들로 가득했다.
앵무새, 닭, 강아지, 고양이까지 하지만 내 관심은 오직 토끼와 염소였다.
시장을 한참 돌아 큰 트럭에서 염소를 파는 아저씨를 발견했다.
"새끼 염소 가격이 얼마인가요?" 물었더니, 아저씨는 귀찮은 듯 담담히 대답했다.
"이십만 원!"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네? 이십만 원이라고요?"
염소 케이지 옆에서 작은 토끼들이 오물오물 귀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럼 이 토끼는요?"
"한 마리 만 원!"
결국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머니! 염소가 이십만 원이래요! 어떡하죠?"
할머니도 놀라셨다.
"그렇게 비싸? 이상하다 내가 살 때는 오만 원이었는데..."
할머니 그때가 언제인데요?
"기억이 안 나지!"
"그럼 토끼만 사 와라."
그런데 케이지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토끼를 보자니 외롭게 지낼 것 같은 마음에 다른 한 마리를 샀다.
서로의 짝꿍이 되어줄 존재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토끼 두 마리를 귀엽다며 안고 할머니 집으로 향했다.
작고 복슬복슬한 토끼 두 마리
귀여운 모습에 "토끼 같은 내 새끼"란 말의 의미를 실감했다.
토끼를 마당에 풀어두니 손바닥만 한 생명들이 깡충깡충 뛰노는 모습을 보며 내 마음은 녹아내렸다.
할머니께 염소는 왜 필요하셨냐고 여쭤보니 "염소는, 나중에 가족들 보신용으로 사려고 했지"
나는 그 말을 듣고 한동안 할 말을 잃었다.
돌이켜보면 그날 할머니께서 염소 값을 몰랐던 건 오히려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를 바라보던 아기 흑염소의 크고 맑은 눈동자가 아직도 또렷이 기억난다.
그 이후로, 할머니는 오일장에서 염소 사 오라는 말을 꺼내지 않으셨다.
염소대신 할머니 텃밭에서 나온 탐스러운 늙은 호박들이 철철이 우리 가족의 보신을 도왔다.
할머니 마당에는 토끼 두 마리가 자리 잡았다. 그저 귀여운 존재로만 남은, 토끼 같은 내 새끼 두 마리
그날의 선택은 시장에서 사 온 가장 따뜻한 추억이자 후회 없는 선택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