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청 받지 않은 답장 (1).raw
슬그머니 짐을 챙겨 살금살금 걸어 나와 현관문을 열었다.
문 옆에 온라인으로 장본 물품도 5db 미만의 소음 만으로 현관에 들여놓고, 문을 살포시 닫는다.
누가 보면 도둑인 줄 알겠다.
지난주부터 장마가 예고되었지만 오늘은 날이 맑다.
자전거로 가려고 헬맷을 챙겼다.
.
..
...
앗. 핸드폰을 두고 왔다.
다시 들어가면 누군가 깰 것 같아서 포기한다.
핸드폰을 두고 왔을 때 들을 수 있는 것과
핸드폰을 가지고 왔을 때 들을 수 있는 것이 다르다.
핸드폰을 가져가면 또 통근시간 활용한다고 뭔가 지적인 팟캐스트 하나 틀어놓고 들으면서 가려했을 거다.
오늘은 그냥 내 생각을 흐르게 하며 가는 걸로.
안 그래도 정리하고 싶은 생각 조각들이 멈추지 않고 흘렀는데, 잘 됐다.
풍경 속에서 내 생각이 흐른다.
(아래 연재글의 결론을 쓸 때도 "그"가 쓴 글들에 대한 나의 반응이 머리에 맴돌았다. 분명 결론에 나도 모르게 담았다.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을)
https://brunch.co.kr/@thewholeiceberg/118
자전거를 타고 갈 때 볼 수 있는 풍경과
자동차를 타고 가며 볼 수 있는 풍경이 다르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며 누릴 수 있는 하늘과 바람이 다르고
달릴 수 있는 길도 다르다
감각도, 규칙도, 배려의 대상도 달라진다
버스를 타고 가는 건 또 다르다.
지난주 평일 오후,
둘째 셋째 아내가 자고 있는 동안 놀이터에서 놀다가
주말에 식당에 두고 온 아이 우산을 가지러 가게 되었다.
차를 타고 가는 대신 버스를 탔다.
'아빠랑 처음 버스 타보지?'
- 할머니랑 타봤어
운전을 하고 가면서 볼 수 없는 아이가 창밖 세상을
차 안 승객을 바라보는 시선을 볼 수 있었다.
대화를 하며 간 다섯 정거장.
내가 운전을 하면서 갈 때, 내가 볼 수 있는 건 교통신호와 도로 상황이다.
모든 골목과 교차로, 차선변경의 순간 속에서 가족들이 다치는 일 없도록 조심히 움직여야 한다.
긴장은 필수이다. 방심하면 안 된다.
버스에서만 누릴 수 있던 걸 누린 거다.
모든 선택엔 결과가 따른다.
어떤 선택은 자연의 섭리라는 조화로운 흐름을 거슬렀기에 그 결과를 맞이하게 되고
어떤 선택은 논리적으로 인과관계 속으로 발생하는 '필연'을 향하기도 한다.
어떤 선택은 자신이 인지하지 못한 전제에 영향을 받는다.
종종 그런 건 인지하지 못한 만큼이나 아주 크게 다가온다.
무엇을 인생의 절대가치로 놓느냐에 따라 거치는 과정과 얻게 되는 것이 달라진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 중 일부는 자신이 운전하는 '차'가 경유차인지, 휘발유인지, 하이브리드인지, 전기차인지 모르고 달리기 쉽다. 연료가 떨어지면 언젠가 멈출 수밖에 없다. 자신이 '생각'하는 유종을 선택해서 주유한다. 그렇게 차가 고장이 나도 왜 고장이 났는지 모른다. 전기 플러그에 휘발유를 펌프질 하는 것도, 휘발유와 디젤을 혼동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지난 연재글의 에필로그에서 사용했던 비유지만 자동차가 제대로 굴러가기 위해 필요한 오일의 종류를 다 알아야 한다. 연료 외에도 엔진오일, 미션오일이 필요하다. 교체주기가 다르다. 그런데 차가 굴러가기 위해 연료만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경제적 조건만 안정적이면 사람이 사람이 '만족'하며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행복이란 두리뭉실한 가벼운 단어로 표현하고 싶지 않다.
그럼 덤으로 건강도 보장되면 될까.
돈과 건강이 주어지면 사람은 '행복'해질까? 삶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그게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나를 위해 일하고, 나를 위해 사는 것.
얼핏 보면 당연하고 멋지다.
남을 위해 산다는 게 노예적이고 종속적이라고 보는 경우에 특히나 그렇겠다.
하지만 자발적 희생과 역할분담은 사회 전반에 퍼져있다.
우리 몸 안에서 각 기관들, 세포 단위에서 일어나는 일도 그렇고
좀 더 크게 드러나는 그 위의 신체의 각 부위를 기준으로 해도 그렇다.
몸은 '머리'로만 혹은 '얼굴'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잠시 뜬금없는 운동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난 혼자 잘하면 되는 운동과 팀으로서 잘해야 하는 운동 모두 좋아한다.
전자는 탁구나 테니스, 달리기, 수영이 되겠고, 후자는 농구나 축구 등 다수의 인원이 함께 하는 구기종목이 되겠다.
스포츠 감독들이 자주 우려먹는 말 중에 "There’s no I in TEAM"이라는 말이 있다.
팀 TEAM이라는 단어엔 ‘나 I’ (개인)이 없다-는 팀워크를 강조하는 말이다.
*물론 마이클 조던 급이 되면 “but there I in win” 하면서 ’승리win 에는 i (내가) 있잖아 ‘ 할 수 있다.
평생 1인 종목만 하겠다고 정하지 않는다면 때에 따라 다른 '스포츠'를 해야한다.
그럴 땐 결국 다른 이와 함께 해야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슬램덩크>를 본 사람만 알 수 있는 비유라서 죄송하지만, 이미 실력이 출중했던 ‘서태웅(流川)’이 레벨업 하는 순간은 ‘패스’에 눈이 뜨는 순간이었다.
동료와 함께 하는 농구를 하기 시작할 때부터.
복서도 MMA파이터도 마찬가지다.
링 위에는 혼자 오르지만, 그 어깨 위엔 자신과 함께 훈련한 트레이너, 코치, 가족 등 대중의 눈에 보이지 않는 팀워크가 존재한다. ( <더 파이팅>이라는 만화가 떠오른다. 영화가 좋다면 <록키>이다.)
신체에서 운동까지 넘어왔다.
이 자연, 생태계는 어떤가.
우리의 밤잠을 방해하는 모기는 잠자리 밥이고, 잠자리는 사마귀 밥이고, 사마귀는 도마뱀 밥이고…
먹이사슬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면 좀 잔인하지만, 이 연결고리 안에서 자연이 운영된다.
하늘을 날아다니던 ‘비행교미충’들 때문에 놀이터가 흉측했던 순간도 있지만, 어느새 그것들은 거미줄에 걸려 거미에게 필요한 식사가 되었다.
이런 자연계 생물 중, 가장 지능이 높은 인류가 가장 정점에 있다.
가장이라고 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유일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물이 다 없어지고, 식물이 없어지고, 인간만 존재하는 사회는 위험하다.
그런 상황에선 인간이 인간을 먹게 된다.
중국은 물론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있었던 일이라는 기록이 있다.
한편,
모두 리더가 될 수 없다.
모두 리더가 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리더가 감당해야 하는 책임이 싫은 사람도 있다.
리더를 서포트하는 것을 잘하는 사람이 있고,
사람들을 잘 리드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재능과 성향을 가지고 살아간다.
전투적인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 이의 글에는 종종 전쟁의 비유가 보인다.
그런데 전쟁은 장군들만으로 할 수 없다.
소수정예의 스파르타의 300 역시 다 개개인을 위해 싸우지 않았다.
맥 아더 장군도 ‘나를 위해’ 살지 않았다.
나를 위해, 국가를 위해, 더 큰 ‘무언가’를 위해 목숨을 건 거다.
전투적인 마음은 역사 속에서 또 일상 속에서 사람들이 하고 있는 ‘희생’과 헌신을 간과하고 있다.
한편, 장교나 사병들은 자신을 통솔하는 장군이 자신들에게 부여하는 가치를 깨닫는 순간이 온다.
부하들이 스스로를 그저 ’ 졸‘(pawn), 버려져도 아무렇지 않은 ’ 졸개‘으로 보게 되는 순간, 전력은 급감한다. ’ 사기‘가 떨어진다.
애플의 스티븐 잡스나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역시 타인과 함께 협업하며 일하는 법을 배워갔다.
그들에게 일은 경제적 안정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 이상이었고, 그런 그들의 '노동'을 통해 세상에 필요한 것들이 생겨났다.
하물며 한 기업의 ‘사원’은 어떨까.
CEO라는 사람이 ‘너희 모두 근로소득으로만 살 생각하지 말고, 개인 사업 해야 돼!’라고 권장하고 그 조언을 따라 모두 퇴사를 한다면, 인사팀에서 매번 새로운 채용에 모집, 선발, 채용, 교육에 또 다른 시간을 할애하고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 (새로 뽑힌 사람이 나간 사람만큼은 해주길 바라며)
잠시, 다른 관점에서 설명해 보자.
출판사에 투고를 하고 출판사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작가가 마주하는 사람들은 모두 '회사를 위해 일하는 '사원'이다. 개인사업자가 아닌 이상.
그런 사원이 작가의 원고를 읽는다.
작가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들까?
원고에서 말하는 주장이 거슬릴 수도 있겠다.
그 주장이 맞다면 자신은 ’ 불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 ’한 단계 아래의 사람‘이니깐.
부정하고 싶을 거다. 특히나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서 그런 일을 하고 있다면.
행여나 그 원고에 너무나 감명을 받았다고 하면? 그럼 그분은 바로 이제 솔로/프리랜서/ 1인 기업/ 창업의 길로 가는 거다. 원고는? ‘다음 담당자가 알아서 하겠지- ’
사회가 망하는 게 아니라, 출판의 길은 자비출판 밖에 없게 될 수 있다.
(물론 다른 길도 있다. 먼저 유명해지고 출판사에서 먼저 찾아오게하는 법)
개인사업, 자본소득, 부동산소득으로만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근로 형태일까. 리스크 측면에서
꼭 그것만이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도 아니다.
나보다 큰 조직에 속해서 여러 사람과 함께 일을 한다는 건, 리스크-헷지이기도 하지만, 개인사업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리스크는 존재한다. 하지만 더 큰 배를 타면 더 큰 파도를 넘을 수 있기도 하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 큰 배를 타고 싶어하지 않기도 하고, 큰 배는 규율이 더 심하기도 하다.)
(배를 타봤다는 그는 왜 이걸 놓치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할까?)
다른 측면에서는 회사가 추진하는 프로젝트가 망할 가능성부터 자본주의 사회에서 법인이 사라지는 가능성은 존재한다. 어떤 낭만적인 원하는 일을 할 적정한 시기를 놓칠 리스크도 있다. 특히 그 도전이 젊음을 필수로 하는 거라면 더더욱.
회사가 매달 따박따박 주는 월급이 ‘노예근성’을 키운다?
그거야 사람 나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무엇의 노예가 되는가는 근로소득을 받는지, 자본소득을 버는지의 차이에서 오지 않는다.
(개인투자로 충분한 자본소득을 얻는 것과 돈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며,
무엇보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자기 꿈을 쫓는 걸 하는 사람들도 있다.
직장생활을 하며 글을 쓰는 작가들이 있고 대학원을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그건 자본소득을 버는 지식을 활용해서 생계를 유지하는 법을 배운 금융지식이 있는 "계급"의 사람이 갖고 있는 가치관에 따라 경제적인 잣대를 가지고 한 개인의 삶을 평가했을 뿐이다.
자본소득 없이 근로자가 노예가 아닌 자발적 근로자일 수 있고
넘치는 자본소득이 있어도 자본의 노예가 되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소비하고 있을 수 있다.
노동의 가치는 경제적 가치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노동 자체에도 가치가 있다.
노동 환경 속에서 성립되는 인간관계는 더더욱 그렇다.
※작가 머신러너 님(https://brunch.co.kr/@m-learnerrunner) 역시 직장을 통해 돈만 벌고 있는 게 아니라 다른 많은 것들을 배우고 있고, 류귀복 작가님 역시 속한 조직 안에서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주고 받으며 책에 담을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을 만들고 있다)
소위 ‘파이어족’의 은퇴 후의 삶이 어떻게 될지 아직 충분한 통계가 없지만,
복권당첨자의 당첨 후의 삶을 추적한 것과 비슷한 양상이 드러날 수 있다.
어떤 이는 경찰이라는 직업을 통해 사회에 공헌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어떤 이는 소방관이라는 직업을 통해 살아간다.
어떤 이는 의사로, 어떤 이는 공무원으로
어떤 이는 농부로, 어떤 이는 환경미화원으로
근로의 가치를 단순하게 경제적 가치로만 판단하면 인간에 대한 이해가 얕아진다.
그건 철학적으로 아주 불완전한 태도일 수 있다.
돈은 많을수록 좋을까?
눈이 크면 클수록, 코는 높으면 높을 수록 예쁠까?
키는 크면 클수록 좋을까?
ㅇㅇ(신체부위), 크면 클수록 좋을까?
사회 속 남성과 여성이 각자 떠오르는 빈칸을 넣어 읽어보자.
빈칸에 넣기 위해 떠오르는 단어에 따라 복장 불편, 시선 불편, 허리 통증, 장기 손상 등 다른 결과를 낳는다.
철학적 중용의 개념을 신체구조에 '적당히'라는 단어로 쉽게 반영시켜 봐도
과유불급 이란 결론으로 도달한다.
지구 전체가 말하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더 따뜻한 남쪽으로 날아가보자.
계속 남쪽으로 날아가면? 어느 순간 더 추워지고, 남극에 간다.
남쪽이 따뜻하단 개념을 배운 후, 알게 된 '남극'의 이름은 역설적이었다.
난(暖) 극이 아니라 냉(冷) 극이다.
우리는 유독 돈에만 관대하다.
다다익선?
돈이 부르는 문제들도 많다.
부와 유명세가 동반되면 더 그렇다.
관계의 진실성을 가늠하기 어렵게 만들고,
'내가' 아닌 나의 '능력'을 보고 다가오는 사람들과 교류하게 되기 쉽다.
지혜롭지 않다면 사기를 당할 기회도 더 많아진다.
무엇보다 부는 주로 인간의 교만을 오만의 경지로 올리고
안하무인으로 만들기 쉽고,
경제적 성공이 인생전반의 성공이라고 생각하게 되어
다른 영역의 미흡한 부분을 놓치게 하기 쉽다.
성공한 영역은 한 영역이지만, 인생의 모든 영역에 대해 자신이 '모든 걸 알고 있다'라고 생각하게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가능하다고 주장해 본다.
인간은 다 죽는다.
죽으면 인간이다.
아니, 죽어야 인간이다.
자, 그럼 우리는 개인 단위에서 확실하게 미래를 안다.
여기는 불가지론의 영역이 아니다.
그럼 인류 단위에선 어떨까?
'팽창하는 우주론'은 시간을 되돌려 역추적하는 방식으로 우주의 기원을 추론할 수 있게 해 줬다.
그럼 그 미래는?
무식한 영어 단어로 표현하자면 HEAT DEATH다.
폭발과 함께 끝.
그렇게 먼 행성의 미래까지 고려할 필요가 없긴 하다.
4만~10만 년 단위로 찾아왔다는 빙하기 사이클도 있다.
긴 역사와 미래 속에서 나의 가치는? 내 자산 가치는?
생명보다, 시간보다 10억, 100억이 더 중요할까?
어차피 끝날 인생 화끈하게 벌고 화끈하게 써보는 게 멋진 걸까?
그게 만족을 줄 수 있을까?
어느덧 다음 날, 새벽이다.
여름의 너무 이른 햇빛이 아이들을 깨우지 않도록 가려진 암막 커튼과 블라이드 사이로 희미한 빛이 스며든다.
입을 옷을 미리 준비해놓지 않아 무채색의 형상들 사이에서 옷을 찾아 입는다.
빛이 부족하면 잘 색깔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색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아, 그러고 보니 그는 보편적이라고 할 수 없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왔다.
전투적인 그가 지금의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굉장한 승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적대적인 게 아니라 타인에게 자신의 승리를 나누고 싶다고 한다.
그는 ’ 악마의 속삭임’에는 넘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빛의 진영에서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그걸 모를 뿐.
내가 일론 머스크나 워런 버핏 정도나 되면
‘젊은이, 인생엔 더 많은 것들이 있네’
하고 한마디 해주겠지만,
나는 일개소시민이다.
금융공학도 대충 알겠지만,
그 삶 속에서 최대이윤을 내는 걸 삶의 목표로 삼으면
그건 내가 아닌 다른 이의 삶을 사는 게 될 거란 걸 안다.
내 삶의 여유, 가족에게 줄 수 있는 여유가 다르다.
그러고보니, 그의 과거 속의 사건들 중, 새로운 게 보인다.
사업이 망한다고 모든 사람들이 술에 빠지고 가족에 대한 태도가 돌변하지 않는다.
('그 쪽 아버지는 망할 사업이라도 있었고 그전까지는 잘 사셨겠네요' 라고 시니컬한 태도로 '무산계급'의 누군가가 비아냥 거릴 수도 있겠다.)
사업이, 경제적 안정, 부를 창출하고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자신의 '정체성'이 되었을 가능성.
무거운 빚과 망한 사업에 따르는 무거운 책임감이 고통스러웠을 거다. 난 상상도 못할 정도로.
그런데 만약 그 '사업실패자'가 술을 마시는 습관이 없었다면?
혹은 그런 풍파 속에도 고통을 이겨낼 '영혼의 닻'이 있었다면?
무너져버리기 쉬운 순간에도 자신을 지켜내고 가족에게 온유할 수 있었다면?
과거의 그를 지켜줄 수 없지만,
만약 그가 이 부분을 간과하고 있다면?
지난 10년간 경제적 성공을 하는 법을 깨닫은 그가 20년, 40년을 더 살아가며
개인 단위로 어찌 할 수 없는 거시경제 속 불확실성을 마주하게 될 때,
같은 모습으로 무너질 가능성은? (나심 탈레브의 <블랙 스완>을 기억하자)
10년은 길어보이지만 짧다.
(내가 잘해서 이익을 얻은 걸 수도 있지만, 시대가 좋아서 인 것도 간과하면 안된다)
에필로그. 내가 할 수 있는 건
난 그를 응원하겠다.
그가 경제적 성공 이외도 꿈을 이루길 희망한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지도 모를 것들이 그 삶에 피어나길 소망한다.
자신이 겪은 어둠을 싸그리 빛으로 지워버릴 정도의 행복이 가득하길 바란다.
아직 그를 충분히 모르기에
내가 다 알지 못하는 이면이 있을 거다.
그래서 나의 공책에 조용히 적는다.
그가 마치 황제인양,
나는 그의 요청을 받아한
문구를 끊임없이 외치는 역할을 맡은 충신인 것처럼
Memento Mori!!
이 글은 왠지 곱씹어 볼수록 부적절한 글이 될 것 같은데, 일단 살려둡니다.
예전의 BLE 테스트로 미루어봤을 때, 이 글은 그 분께 아마 닿지 않을 거로 예상해보기도 하지만,
또 모르니깐요.
주의: 제가 3인칭으로 스스로에게 쓴 글은 아닙니다...
*자전거를 타며 생각나는 것들을 담은 시리즈로 새 매거진을 해볼까 생각해봤습니다. 이름을 Bicycle Diary[바이시클 다이어리]를 하고 싶었지만, 어느 작가님께서 이미 그 제목으로 책을 내셨기에, 바이시클 저널로 해야 하나 고민 됩니다. 애당초 Motorcycle Diary를 패러디한 거니, 창의성은 없는 제목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