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사误解史:오해와 나의 역사
※읽기보다 듣는 걸 선호하시는 분들을 위해 오디오북처럼 음성을 녹음한 유튜브 영상을 함께 올립니다.
https://youtu.be/ZlG6x4NzvYo?si=ESMQGNbTUpGRO2-1
동전엔 면面이 몇 개 있나요?
-앞, 뒤
동전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검지 손가락으로 동전을 쳐봅니다.
어쩌면 스포츠경기에서 하는 것처럼 하늘 위로 동전이 날아가게 하는 장면이 더 익숙할까요?
'팅-'
지금까지 늘 동전의 앞, 뒤로만 내기를 해왔던 우리.
이 동전은 빨리 돌아갈 때는 구형(球形/sphere)을 보여주다가 멈춥니다.
동전이 순간적으로 만들어내는 구형을 보는 사람은 있을 지 모르겠지만, 동전의 옆면에 주목하는 분들은 소수일 거라 생각됩니다.
전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이분법적 사고로 바라보는 세상 속의 또 다른 가능성인 "옆면"을 보게 되는 순간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전 오해라는 단어를 긍정적으로 바라봅니다.
거짓말, 착각, 오류 등 오해 대신 사용할 수 있는 단어 중에 가장 상대방을 적대시 하지 않고 화해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단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마주했던 모든 오해들과 원만한 '화해'를 경험한 건 아닙니다.
하지만 오해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지하는 것 만으로도 삶이 좀 더 자유로워졌습니다.
어떤 오해는 너무 사소해서 무시하면 되지만, 어떤 오해는 인생의 큰 여파를 남깁니다.
예를 들어 한 아이가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오해를 가지고 살아간다면 그 아이의 자존감이 삶의 여러 영역에 영향을 미치겠죠. 그리고 그 사람이 나중에 만나게 될 연인, 배우자, 자신의 아이들에게 퍼져갑니다.
제가 어떻게 ‘오해’라는 단어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는지 그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 '안물안궁'일 수 있는 제 삶의 단편들을 나열하며 시작해보려 합니다. 청년과 노년 사이의 어중간한 나이라 제법 길 수도 있습니다.
물 한 잔 마시면서 천천히 따라와 주세요.
(의외의 많은 두통은 수분섭취 부족으로 일어난다고 합니다. 커피와 차는 물 마시는 것과 달라요.)
요즘 말로 ‘중2병’, 어른들에겐 더 익숙한 단어인 사춘기. 전 그 시절 중국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국민학교라는 명칭이 초등학교로 변하기 조금 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시절, 회사원이었던 아버지의 비상식적인 ‘커리어 전환’이 있었습니다.
그때 달라진 삶의 궤도가 결국 저희 가정을 미지의 땅으로 이끌었죠.
모국어인 한국어 외에는 1주일에 한 번 오던 눈높이영어를 통해 조금 배워둔 영어가 있었고, 초등학교 자습시간에 하루에 두 글자씩 공책 한 면을 가득 채웠던 한자쓰기가 있었습니다.
국제학교를 가는 건 가정형편상 불가능했죠..
그렇게 중국어를 아예 못하는 상황에서 중국 현지인 학교에서 학업을 이수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겁니다.
그렇게 시작된 제 해외 생활 속에서 전 새로운 환경에서의 적응을 목표로 하고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중국에서 시작된 삶에서 언어의 한계를 통해 여러 오해가 생기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오해받지 않기 위해 중국어를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초등학생 주제에 새벽 5시에 일어나서 등교하기 전에 공부를 하고 밤 12시까지 공부를 했던 것 같아요.
그 때부터 초등학교 매년 12-15cm자라던 키가 1-3cm로...성장폭이 줄어 드는 비극이 시작됐네요.
언어가 늘고 나니 이번엔 제가 가지고 있던 오해를 발견하게 됐습니다.
4-5년간 계속된 중국 생활. 이방인의 삶, 오해받는 것에 염증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도전을 회피하는 성향이었던 제가 미국교환학생 시험에 도전해 봤습니다.
그 역시 회피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도전의 성격이 더 강하다고 주장해 봅니다.
그 결과, 비행기값 정도만 내고 한 학년을 미국 공립학교를 다닐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했죠.
여기서도 또 다른 오해들을 만났습니다.
그 때는 미국에서 만난 친구들이 중국과 한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제가 경험한 세상을 바탕으로 열심히 설명했던 것 같아요..
그 1년을 마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고등학교를 졸업합니다.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는데 여기서도 새로운 오해들을 만났습니다.
고등학교, 대학교, 군대, 이제 10년 넘게 다닌 회사, 결혼한 후 가정 안에서도 숨어 있는 오해.
곳곳의 영역에서 참 많이도 숨어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세상엔 참 오해가 많았고, 오해를 풀어갈수록 세상을 조금 더 또렷이 볼 수 있게 됐던 것 같습니다.
모르면서 싫어했던 것들을 내려놓게 되었고, 관심 없던 것들에 대해 알게 되면서 지식을 쌓아가게 되었습니다. 비단 인간관계 안에서만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추상적인 개념이나 사회 현상 속에서도 이런 오해들을 만났습니다.
그 오해들은 제가 찾아낸 보물들입니다.
그 보물들을 브런치에서 나눠보려 합니다.
#CASE 1
한국에서는 분명히 ‘민주주의 대한민국’, ‘공산주의 중국’이라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중국의 공립학교를 다니면서 ‘사상교육’이란 수업을 들어보니 그들은 ‘사회주의’라는 단어로 국가체계를 설명했습니다.
공산주의는 그들의 최종목표이고 이상향 같은 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은 미국과 같이 자본주의라고 했습니다.
정치에 관심이 없던 초등학교 6학년은 왜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라고 부르는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공산당은 나쁜 거라고 배웠는데 중국학교에서 공산당원의 주은래[周恩来저우 언 라이[나 등소평[邓小平덩 샤오 핑]의 일화들을 들어보니 나쁜 사람 같지 않습니다.
공산국가, 아니 사회주의국가에 사는 나와 같은 나이의 같은 반 학생들이 나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나와 같이 학교를 다니고 공부를 하고 수학보단 농구를 좋아하고, 좋아하는 여자/남자아이들이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학교에서 만난 선생님도, 친구들의 부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냥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CASE 2
그러다가 정말 답답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역사시간에 ‘조선전쟁’이라고 불리는 사건을 얘기하며 남한과 미국이 중국땅을 침략해서 중국군이 압록강을 넘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에게 말했습니다.
“북한이 남한을 침략해서 전쟁이 시작된 거야. 이거 거짓말이야.”
친구들이 다 같이 말합니다. 교과서에 기록된 게 맞다고.
초등학교 6학년생이 중국어를 배운 지 이제 배운 지 겨우 1년.
인터넷은 커녕 집에 컴퓨터도 없던 시절.
‘난 (한국) 학교에서 이렇게 배웠어’ 같은 설득력이 없는 말 밖에 할 수 없었죠.
전 민주주의/자본주의 한국에서 이렇게 배웠고, 그들은 공산주의/사회주의 중국에서 다르게 배운 것 뿐이었습니다.
분명 진실은 존재할 텐데, 증거와 논거를 찾을 수 없었던 그 시절.
서로서로의 역사관을 검증하고 '객관적 사실'을 찾기 어려웠던 기억이 납니다.
대화의 주제가 그 이전의 과거로 흘러가 ’항일전쟁‘으로 넘어가니 같은 역사관으로 돌아옵니다.
‘어쨌거나 일본은 나쁘다’ 는 말을 하며 서로 '공동의 적'이 있는 걸 확인하고 논쟁을 마칩니다.
#CASE3
세월이 흘러 다른 도시로 이사가게 살게 되었습니다.
여기선 한국인과 일본인을 제외하고는 주로 알바니아, 불가리아, 쿠바, 캄보디아 등 친 사회주의국가에서 유학을 온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는 북한에서 온 친구도 있었습니다.
전 중국생활을 하며 굳이 학교에서 한국말을 사용하고 싶지 않았기에 주로 외국 국적의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냈습니다.
어느 날 저녁, 필리핀 사람, 일본 사람, 북한 사람, 그리고 남한 사람(저), 이렇게 네 명이서 KFC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 하는 이벤트가 있었습니다.
북한사람과 얘기를 한 남한사람이 되고보니 기분이 묘했습니다.
일단 북한사람도 그냥 사람이었네요.
귀가길에 특수공작원이 저를 잡아가진 않을까 하는 상상 속에서 불안한 귀가길을 경험했습니다.
다른 한 편으로는 다행히(?) '사랑의 불시착' 같은 러브스토리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CASE 4
이런 정치적, 역사적 오해 말고도 학생으로서의 삶 속에선 "몽글몽글하다 처절해진" 오해도 겪었습니다.
전 한국에서 이미 가족보다 친구를 좋아하던 소년이었습니다.
부모로부터 떨어지는 것보다 친구들과 떨어지기 싫었는데, 선택의 여지가 없네요.
중국에서 첫 번째 도시에서 좋아하는 바다가 있어서 자연환경에서 위로를 받으며 겨우 겨우 적응합니다.
그 곳에서 사귄 친구들과 우정을 쌓아왔는데, 아버지의 결정으로 새로운 도시로 이동하게 됩니다.
더 이상 친구 만들기에 힘을 쏟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방인인 저에게 어차피 잃게 될 친구들인데 그런 관계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졌습니다.
그 때 새학교는 외국인학부가 있는 중국학교였는데, 태국 국적의 털털하고 친절한 '짝꿍' 덕분에 새 학급에서 조금씩 마음이 열렸죠.
저와 그 태국친구는 그 프레임을 거부하고 사이좋게 지내려 노력했습니다.
우리를 '연애 프레임'으로 몰아넣는 친구들을 무시하는 한 편, 세 명, 네 명의 그룹이 되어 친분을 쌓으려 하는 현실적인 노력도 했던 것 기억이 납니다.
남녀 차이에 대한 평균적인 이해에 근거하면 '여성은 사람과 관련된 이야기를 선호하고 남성은 사물에 관한 이야기를 선호한다' 라는 연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전 그 평균 범위 밖의 '아웃라이어outlier' 남성이었는지, 전 다른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했습니다.
남학생들과는 주로 운동을 하고 긴 대화를 하는 건 여학생들이었던 것 같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래학우들은 그 모습을 중,고등학생의 '유치한' 시선, 즉 연애의 프레임으로 해석하고 저와 대화의 대상을 집어 넣으려 했습니다.
그 안에서는 '남학생과 여학생이 같이 있는 건, 연애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있었죠.
어떤 여학생은 핀란드 사람 아버지와 중국인 어머니와의 오래된 갈등 때문에 이혼을 마주해야 하는 고민을 토로했습니다.
또 다른 친구는 문화혁명 때 반정부 운동에 가담한 문학가의 딸이었는데, 미국에 있는 아버지를 자주 만날 수 없었던 그리움에 대한 고민을 나눴습니다.
물론, 저에게 여학생만 그런 고민을 나눴던 건 아닙니다.
한 필리핀 남학생도 가정의 불화 속에서 자라고 있었는데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심취했죠. 그 친구에게 도피처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가 접한 만화책들이 그 친구가 여자아이들을 대하는 걸 어렵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나이가 들어 알게 된 어른들의 단어를 사용하자면, “여성을 성적대상화하지 않는 순수한 시선”을 잃게 된 거죠.
그렇게 의도치 않게 교내에서 '농구 잘하고 영어도 꽤 하는 염세적인 남학생'에서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상담가'로서의 이미지가 덮어씌워졌습니다.
그런 와중에 짖궂은 알바니아 국적 여학생과 쿠바 여학생의 주도로 시작된 '이상한 소문'이 이 프레임에 씌워지면서 수위가 올라갑니다.
제가 학생시절에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성관계를 소문에 넣은 겁니다.
그렇게 제가 살게 된 중국의 두번째 도시에서 사귄 첫 친구는 저와의 우정을 포기하기로 결정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말도 섞지 않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 사건은 당시의 제 삶을 회색으로 만들었습니다.
안 그래도 파란 하늘과 푸른 바다가 있던 도시를 잃고, 공기조차 회색인 것 같은 잿빛 도시로 이주하게 되서 정을 붙이기 어려웠던 고등학교 1학년.
그렇게 제 마음의 푸른 빛이 소실 되었습니다.
어리다고 하기엔 너무 어른에 가까웠고, 어른이라고 하기엔 아직 어렸던 고등학생.
전 그 때 남성과 여성, 두 가지 성으로 구분되는 인간관계를 알게 되었습니다.
"남성 간의 호감은 우정, 남-녀 이성 간의 호감은 연애 감정" 이라는 구분법에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때 어떤 관계에 대한 깊이와 스펙트럼spectrum에 대해 인지하게 된 것 같습니다.
제 전 세대의 가요 피노키오의 <사랑과 우정 사이>란 곡으로 어른들은 익히 알고 있던 그 고민 을 그때서야 하게 하게 된 거죠.
그게 제가 중국을 떠나고 싶게 한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전 지금은 고인이 되신 어머니 친구 분께서 소개해준 교환학생 시험에 지원하게 됩니다.
학기 중에 한국에 나와 별 준비 없이 본 시험이었지만 운 좋게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미국 공립고등학교 생활에 도전하게 됩니다. 호스트패밀리는 자원봉사자의 마음으로 참여하는 건지, 별도 비용을 받지 않고 자기 집에서 살게 해주는 모델입니다.
전 혼자서 캐리어 2개, 백팩 하나, 크로스백 2개를 메고 큰 비행기를 타고 14시간을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큰 공항에서 털털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작은 비행기를 타고 텍사스의 달라스와 오스틴 사이에 있는 작은 도시 WACO[웨이코]* 공항에 도착합니다.
※WACO: 한국에선 마이너한 음료 닥터페퍼(Dr.Pepper)의 고향입니다. 하지 데이비드 코레쉬(David Koresh)라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Seventh-day Adventist Church)의 한 분파인 '다윗교'의 광신적 종교지도자와 그 신도들이 무장하여 FBI와 수십일간 무력대치를 한 사건,'웨이코 포위전(The Wace Siege)' 라는 사건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 사건은 넷플릭스 시리즈 <웨이코: 아메리칸 아코칼립스>로 만들어지기도 했어요. [웨이코]가 아니라 [윀코]로 읽으시면 안되요. '미친, 정신나간' 의 wacko가 됩니다.
절 맞이하러 나온 호스트패밀리는 이민자 필리핀 노부부였습니다.
두 분 다 간호사로 일하다가 은퇴를 했고, 자신들을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잔디밭과 수영장이 있는 '뒷마당'이 있는 방 네 개 짜리 ‘작은 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가보니 독일에서 온 남학생도 같이 있습니다.
이렇게 네 명이 함께 살게 됐습니다.
#CASE 5
학교에 간 첫 날 점심시간, 파란 눈의 금발 곱슬머리 여학생이 묻습니다:
“Where are you from?
어디서 왔어?"
- I am Korean, but I came from China
한국인인데 중국에서 왔어
옆에 앉은 친구가 끼어 듭니다.
"I love Dragon Ball.
나 애니메이션 드래곤볼 좋아해"
파란눈의 여학생이 말을 끊습니다.
‘Dumbass. That’s Japanese Animation
바보야. 그건 일본 꺼야‘
다른 질문이 들어옵니다.
“Do you have telephone in China?
중국엔 전화기 있어? “
서기 2000년이 지난 시점에 이런 질문이라니.
어이가 없지만 예의 바르게 말합니다.
“Yes”
순진한 눈으로 묻습니다.
“How about bicycle?
자전거는?“
숨겨지지 않는 어이없음이 실린 대답이 나갑니다.
“Of course!
당연하지!”
악의가 느껴지지 않는 그들의 천진난만함.
무시 받는다는 기분대신 그저 어이없을 뿐이었습니다.
마을표지판에 인구가 3,078명이라고 표시된 텍사스 주의 작은 마을.
한국인은 나를 포함해서 총 2명.
한 명은 어린 시절 입양되서 한국어도 못하는 ‘킴’.
그들의 세상은 많이 좁았습니다.
이제 막 인터넷이 보편화 되고 있던 두 나라의 학생들의 조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놀랍게도 미국에선 수학시간에 전자계산기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간단한 더하기부터 삼각함수까지, 굉장히 복잡한 기능을 가진 공학용계산기.
전 중국에서 배운 수학으로 계산기 없이 그들의 pre-Calculus 수업문제들을 풀었습니다.
아이들이 놀랍니다.
중국에서 배운 고어에 담긴 철학으로 역사시간, 영어시간에 다른 친구들과 다른 견해를 던져줍니다.
선생님들이 놀랍니다.
그들은 중국과 한국에 대해 적지 않은 오해를 하고 있었고 다행히 전 그 오해를 풀어줄 수 있었습니다.
한국인이 왜 한국에 대한 오해가 아니라 중국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고 좋아했을까요.
중국에 있던 친구들을 대신한 설욕이었을까요?
정확히 기억 나지 않습니다.
#CASE 6
친구들이 생기고 좀 친해져서 이야기 하다가 헐리우드 영화에서 보던 거친 말투를 써봤습니다.
“fxxxing a**h***”.
친구가 정색하며 말합니다.
“Don’t talk like that. We don’t talk like that. Only people in the movies do."
그러지마. 여기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 없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이나 그렇게 말하는 거야.“
아, 저도 오해하고 있었네요.
미국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영화에 나오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감탄할 정도로 예쁘고 멋진 친구들은 극소수였습니다.
전 당시 178cm가 조금 넘는 고등학생이었고 학교에선 평균 이상의 키였습니다.
저 보다 작은 여자아이들은 많았고, 큰 남자아이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물론 한국에선 흔히 볼 수 없는 거구의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중국에서도 농구를 워낙 좋아했고 주말엔 새벽 6시부터 근처 공사장에 있는 농구골대에서 점심시간까지 농구를 했습니다.
열심히 하니 어느 정도 잘하게 됐습니다. 미국에서는 농구부에 들어가려면 체력테스트를 해야한답니다.
겨우 겨우 체력테스트를 통과해서 농구부에 들어갔습니다. 주전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2군에서 경기에 참여하며 좋아하던 취미를 이어갑니다.
농구를 하다보니 제가 가지고 있던 오해를 또 발견했습니다.
흑인이면 모두 다 빠르고, 높이 뛸 수 있고, 모두 노래를 잘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네요.
마이클 조던이라서 농구를 잘하는 거지, 흑인이라서 잘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보이즈투맨’은 흑인이라서 잘하는 게 아니라, 그냥 노래를 잘하는 흑인그룹이었던 겁니다.
<슬램덩크>나 <명탐정코난> 같이 중국어로 번역된 일본만화책을 가끔 읽기는 했지만, 일본어가 나오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기 시작한 건 미국에서였습니다.
드래곤볼을 좋아한다던 그 친구는 제가 한국으로 떠난다고하니 ‘바람의 검심’이란 애니메이션을 비디오테이프로 녹화해서 제게 선물해줬습니다.
미국TV에서 영어로 나오는 <드래곤볼>은 ‘하아~~~~~!!!!!’ 하는 기합소리로 25분 에피소드 중 10분 이상을 소모하니 도저히 볼 수가 없었습니다.(손오반이 셀과 싸우던 그 시절의 장면입니다.)
’먼 나라 이웃 나라‘라는 만화책 시리즈가 집에 있었는데, 거기에 일본인들은 ‘소극적이고 본심을 숨긴다‘ 라는 묘사가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일본인 친구들이 있었는데 같이 농구도 하고 음악도 듣고 기타도 치고 음악을 하며 친해졌습니다.
하지만 제 친구들은 소극적이지도 본심을 숨기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외국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사실 한 나라의 전형적이라할만한 ‘국민성’을 대표하지 못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 친구들 덕분에 ‘가깝지만 먼‘ 일본이라는 나라 대신, 개개인과 친구가 되어가며 일본에 대한 오해가 조금씩 걷혀집니다.
다시 수년이 흘러 한국에서 대학생활을 하다 군 입대전에 일본에서 8주간 살아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일본 홋카이도에서 가을을 보내고, 초겨울 눈을 몇 번 보고 돌아왔습니다.
그 곳에서 현지생활을 하며 일본사회를 체험하게 됐습니다.
‘생각이 많고, 표현을 잘 안하고, 배려를 많이 하고….
전형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인에 대한 묘사가 들어맞는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그랬지만 서로 마음을 열고 가까워지니 역시 사람은 어디서나 비슷합니다.
그러던 중, 제일 친해진 친구에게 이런 말을 듣습니다.
“넌 어떨 때 보면 생각하는 게 일본 사람보다 더 일본사람 같아.”
일본사람 같은 건 어떤거였을까요.
아무튼,한국 언론에서 종종 언급되는 '혐한 정서'는 느끼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같은 만화, 같은 뮤지션을 좋아하면 우린 친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같은 취미, 같은 세계관을 공유한다는 게 국적을 초월하게 하는 좋은 요소라는 걸 배웠습니다.
그 과정에서 언론은 정치적 목적을 가진 여러 집단 중 한 쪽을 지지하고 있다는 걸 보게 됐습니다.
또 진실보다는 경제적 이익을 우선시 하는 언론, 고결하지 않은 저널리즘에 대해 어렴풋이 자각하게 됐습니다.
어린이와 어른 사이의 어중간한 나이에 한국을 떠나서인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같은 건 모르겠습니다.
올림픽이든, 한일전이든 꼭 봐야겠다는 불타는 애국심도, 열정도 그다지 없습니다.
미국을 떠나야 하는 마지막 주에는 한일공동주최 월드컵 경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머무는 동안 호스트패밀리가 두 번 바뀌었는데, 마지막에 머물고 있던 집의 축구를 좋아하는 브라질 쌍둥이들은 새벽에 일어나 축구를 봤습니다.
한국이 미국이랑 했던 경기였던 것 같은데 전 쿨쿨 자고 있었습니다. .
미국, 중국, 한국에서 굳이 스스로를 ‘지구인’으로 묘사했던 적도 있는 것 같습니다.
막상 생각해보면 한국 문화에서 청소년시절을 보내지 않았으니 정서적으로 전형적인 한국사람의 ‘그것’이 없나봅니다.
외국생활을 하고 왔다니 거기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을 가지고 있는 듯한 사람들도 대학교에서 꽤 만났습니다.
성적으로 개방적일 거라든가, 술을 잘 마실 거라거나, 저와 어울리지 않는 상상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뉴스에서 안 좋은 일들이 보도 됩니다.
때로는 여론, 때때론 국민정서란 단어로 표현되는 반미, 반일, 반중….
전 그 어디에도 동조할 수 없었습니다.
“미국 싫어” 라고 말하는 것에 동조하자니 친구들이 살고 있습니다.
뉴스에서 보도되는 일과 제 친구들은 무관하니 쉽게 같이 흥분하며 욕할 동기 부여가 안됩니다.
“중국 싫어” “일본 싫어” 도 그렇습니다.
국제사회에서 외교, 정치, 경제적 이익 충돌이 발생할 때, 국민의 분노의 대상은 한 국가의 국민들이 되는 건 이상했습니다. 정치에 관심이 없는 대중을 미워하는 것 대신 특정집단이나 인물로 국한하는 게 정확한 타겟팅이 될 것 같은데…그렇게 하자니 헤드라인 공간이 모자라서 인걸까요….?
'나라'와 '구성원'에 대한 구분이 없는 게 문제라고 생각됐습니다.
그렇게 오해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예리해지기 시작합니다.
단순한 일반화에 대한 경계심이 생겼습니다.
단순한 편가르기에 대한 경각심이 생겼습니다.
직장생활 2년차. 보증금을 모아 독립을 하게 됐습니다.
퇴근 후, 유튜브에서 이런 저런 영어 콘텐츠를 보며 저녁을 먹는 게 일상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웃고 싶을 땐 미국의 여러 코미디 프로그램들을 봤습니다.
그러다 미국 선거시즌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한국에서도 쿠팡플레이의 SNL로 유명진 '새터데이 나잇 라이브(Saturday Night Live)' 라는 프로그램을 비롯한 여러 코미디 쇼 호스트들이 도널드 트럼프를 풍자합니다.
심지어 미국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는 직접 출현도 합니다.
별 생각없이 재밌게 보며 도널드 트럼프라는 인물에 대한 비호감이 커졌습니다.
그러다가 유튜브에서 두 선거후보가 토론을 하는 영상을 보게 됐습니다.
당연히 변호사자격증이 있는 힐러리가 말을 조리있게 더 잘하고 트럼프는 이상한 소리를 합니다.
표현 방법과 전체적인 이미지를 봤을 때는 힐러리가 우세한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토론을 통해 승자를 예측하기 어렵다는 걸 선거결과를 통해 깨닫게 됩니다.
사람은 이성으로만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집단은.
그러고보니 ‘민주주의를 선도하는‘ 미국의 선거제도는 한국보다 중국을 닮았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국민 개개인의 투표수로 결정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미국도 중국처럼 ‘대표들‘이 국민을 대신해서 다시 투표를 하는 시스템이라는 걸 그 때 처음 알았습니다.
정치에 관심이 없었기에 어찌보면 당연하기도 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중국에선 정치에 관심을 갖으면 안됐습니다. 친구들과는 불필요한 갈등의 소재였고,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정치는 국민들이 참여할 수 없고 위에서 좋은 선택을 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깐요.
그런데 이 시절 처음으로 토론이랑 포맷의 콘텐츠가 재밌다고 느껴졌습니다.
한편으론 지금까지는 한 쪽 입장을 대변하는 콘텐츠에만 노출되어있다는 자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코미디 콘텐츠를 버리고 미국을 가르는 여러 이슈들의 토론을 즐겨 보게 되었습니다.
어떤 주제에 대해 깊이 알고 싶으면 토론 콘텐츠는 정말 유용하단 걸 배우게 됐습니다.
미국국민들을 나누는 주제는 ‘좌 vs 우‘이기도 하지만 ’종교가 있는 사람들 vs 종교가 없는 사람들’이란 것도 체감했습니다. 당시 연애 관계 때문에 평생 관심이 없었던 ‘유신론과 무신론‘에 대해서도 그렇게 토론 콘텐츠를 통해 정보를 쌓아갔습니다.
한편 토론 전략에 대해서도 인지하게 됐습니다. 상대방이 발표를 못하게 전략적으로 말을 끊거나 상대방의 주장을 왜곡시키기도 했습니다. 예: 허수아비 때리기 오류 (Straw man fallacy)
그래서 토론을 통해 알게 된 사람들이 강의나 팟캐스트를 통해 차분히 들어가며 보충했습니다.
확실히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곡해되지 않은 본의(本意/true intent)를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 과정에서 과학과 철학을 구분하는 법을 배우게 되고, 주장과 근거, 의견과 사실을 구분하는 연습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서로 다른 국적을 가진 두 사람이 만나 사랑한다며 결혼했습니다.
전 초등학교 6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을 졸업할 때까지 중국에 살았고, 아내는 한국에서 석사, 박사과정을 밟은 대학원생입니다.
결혼 5년차인 저희 부부는 서로 사랑하지만 같은 시점에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어떤 때는 키 차이에서 발생하는 시선차이로 서로를 배려하려는 마음가짐이 없다고 오해하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신중하기도 하고 느긋하기도 한 제 성격과 즉흥적이고 급한 아내의 성격 차이에서 오해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크게는 자라온 문화권이 다르고, 작게는 서로 다른 가정에서 자라 서로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아내는 저를 위해 뭔가를 하고 칭찬을 기대하고 있는데 전 객관적으로 혹은 논리적으로 잘못된 점을 이야기 할 때도 있습니다.
저는 아내를 위해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어떤 걸 하고 아내가 만족하길 바라는데 아내는 그게 마음에 안 든다며 불평을 할 때가 있습니다.
아내는 공감과 위로를 바라며 힘들다는 얘기를 할 때, 전 이상理想적인 태도로 감사의 태도가 삶에 미치는 영향을 이야기하며 속을 긁기도 합니다.
아내는 저와 근본적인 가치관이 비슷하지만 세부적으로 보면 분석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저와 세상을 다르게 바라볼 때가 많습니다.
그게 육아를 할 때의 시선차이를 느끼게 할 때도 자주 있습니다.
어떤 때는 보편적인 생물학적 차이에서 발생하는 남녀차이가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심리학적 차이에서 다른 접근을 하기 때문에 부딪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행히 전 어렸을 때부터 의식적으로 늘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마침 아내는 지혜로운 사람을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전 저보다 지혜로운 이들의 지혜를 하나 둘 모아가며 절 다듬어가며 살아갑니다.
(아내도 기분이 좋을 때는 마음을 열고 제가 수집한 지혜를 들어줍니다.)
조금씩 저희는 어떤 문제를 두 사람이 해결해야 하는 '숙제' 같은 것으로 구분하는 연습을 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인간관계에서의 오해를 다룰 때 아주 중요한 시선을 배우게 됐습니다.
문제와 사람을 구분할 것.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사람 자체가 문제’라고 바라보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워 지는 겁니다.
그 사람 자체가 문제가 되면 그 사람이 사라져야 문제가 사라집니다.
연애라는 관계 안에서는 적용할 수 있겠지만 결혼이라는 구속력이 더 강한 관계 안에서는 지양止揚해야할 태도겠죠.
결혼을 하고보니 서로 가지고 있는 '사랑'에 대한 정의가 다르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저와 아내는 큰 틀에서 사랑에 대한 가치관이 같습니다. ‘진정한 사랑’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과 ‘초월과 희생’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좀 더 '헐리우드-디즈니 버전'의 사랑을 기대했고, 전 어떤 책을 통해 제가 가지고 있던 '헐리우드-디즈니 버전'의 사랑에 대한 환상을 깼기 때문에 결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코로나19라는 특수한 기간에 두 아이를 출산하고 재택근무라는 특수한 형태의 삶으로 신혼부부, 신생아 부모의 삶을 보냈습니다.
처음에 코로나19가 이슈가 되었을 때, 전 캐나다, 호주의 뉴스에서 의학박사들이 '코로나바이러스'를 설명하는 영상으로 기초 이해를 얻게 되었습니다. 공포심을 조장하기 보다는 의학적인 내용을 담담하게 소개했습니다.
어떤 뉴스에 소개된 사례 중, 신생아가 코로나19에 감염되고 엄마의 모유만으로 바이러스를 이겨낸 사례를 알게 됐죠.
그래서 처음부터 특별한 지병이 없는 건강한 저희 부부, 그리고 아이들이 코로나19로 위험해지는 걸 걱정하지 않고, 큰 불안함 없이 그 기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재택를 권장하던 기간이 끝났습니다.
사무실 출근이 시작된 후에도 도보 출근, 계단 사용 했고 점심을 집에서 먹고, 업무상의 99%소통은 키보드를 통해서 했습니다. 감염리스크가 상대적으로 (많이) 적은 축에 속했습니다.
그래서 성급하게 배포되고 있는듯한 백신을 급하게 맞는 것 대신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그동안 직종의 특성상 제 가족을 비롯한 일부 지인들은 백신을 맞고 부작용으로 부정맥, 심근염을 얻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2022년이 되서야 저희 식구 모두 코로나19에 감염됩니다.
아이 예방접종을 하러 간 소아과과 코로나 검사를 해주는 병원이었던 걸 뒤늦게 알았어요.
백신을 맞지 않은 상태에서 경험한 코로나19.
약해진 변이 때문이었는지, 면역체계가 좋아서였는지, 두 사람 다 정부의 안내에서 얘기한 것 같은 경미한 증상을 거쳐 건강을 회복하게 됩니다. 첫째 아이, 둘째 아이 모두 이틀 정도 열이 나긴 했는데 특별히 힘들어 하지 않고 잘 넘어갔구요.
몇 달 후, ‘코로나 백신은 뱀독이다'라고 주장하는 영상을 어머니로부터 공유 받았습니다.
전 평소에 의심 많고 철저한 조사 후에 결론을 내리기 좋아하는 성향 입니다.
그 영상에서 주장하는 내용과 근거들을 쫓아가보니 소위 말하는 '음모론'이었습니다.
미국 대학의 연구결과를 인용할 때 논문을 왜곡해서 해석하고 표현했습니다.
백신부작용은 분명 존재하는 것 같았지만 잘못된 곳에서 이유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어떤 것을 근거로 음모론을 사실로 받아들이는건지 궁금해 '음모론 까페'에도 가입해봤습니다.
검색하면 음모론을 퍼다나르는 콘텐츠, 단순히 영상을 번역한 내용의 콘텐츠만 가득하던 네이버 검색결과에서 한동안 상위권에 노출되었습니다.
살펴보니 그들은 단순한 이분법, 충분한 조사 없는 결론, 피해망상과 확증편향 위에 쌓이는 왜곡된 근거들, 현 정권에 대한 불만 등 이유는 다양했습니다.
공부하며 육아를 하다보니 아이들을 기르며 발견하게 된 오해도 있었습니다.
성선설과 성악설, 영양학, 발달심리학, 대대로 내려져 오던 할머니들의 ‘-카더라’까지.
역시 같은 문제를 다르게 해석하는 전문가들은 서로의 전문영역에서 다른 시선으로 다른 곳에서 원인을 찾고 다른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이렇게 2018년부터 과학, 종교, 철학, 역사, 고고학, IT, 육아 분야를 가리지 않고 오해를 쫓아다니면서 5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브런치스토리로 개명한 브런치로부터 ‘집필 면허(License to Write)’을 받고 이 브런치북을 연재 합니다.
다음 주 부터 본방입니다.
다루게 될 각 주제 모두 한 두 권의 책은 족히 뽑아 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주제입니다.
하지만 글을 읽으실 독자님의 나이(혹은 연세)가 어떻게 되시든 남은 인생을 살아갈 때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사는데 도움이 되는 그런 내용을 담아내려 합니다.
행복이 삶의 목표가 아닌 분들도 많겠죠.
하지만 행복이 찾아올 수 있는 전제조건은 알아두시면 좋을 거에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에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다면 행복보단 고통이 오는 법칙이 있으니깐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고 5층 짜리 건물에서 뛰어내리면 다리가 부러집니다.
차는 디젤엔진인데 조용하게 운전하고 싶다며 휘발유를 넣으면 차가 고장납니다.
컴퓨터를 깨끗하게 하겠다며 물 청소를 하면 그 컴퓨터는 아마 다시 켜지지 않겠죠.
우리의 제한적인 경험은 우리가 이 세상을 바라볼 때, 어떤 부분은 부각시키고 어떤 부분은 무시하게 작용해왔을 겁니다.
그게 너무나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거나, 그게 너무 싫었기 때문에 반대 입장을 취하게 된 경우도 있을 겁니다.
살아오며 비슷한 이야기를 너무 자주 봐왔기 때문에 그게 나에게 예정된 미래이고 사실이라고 믿게 되었지만, 그 이야기가 현실이 아닌 스크린 너머의 픽션인 걸 잊고 있었을 수도 있죠.
"모든 결혼은 불행한 거야" 라는 오해를 가지고 살아가면 '혼자 사는 삶에 대한 과도한 낭만'이 부각된 기대만 가지고 살다가 예상하지 못한 ‘삶의 외로움'을 마주할 수 있는 것처럼요.
전 이 브런치북을 통해 우리가 이분법적 사고로 바라보는 세상 속의 또 다른 가능성인 "옆면"을 보게 되는 순간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