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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인아 Apr 12. 2022

나의 내면 속 '케빈'에 대하여

<케빈에 대하여> 영화 해석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케빈에 대하여>를 일반적으로 '타고난 모성에 대한 회의와 선천적 사이코패스 아들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로 표현하고는 한다. 영화의 코멘트와 리뷰 영상의 댓글들만 보아도 사랑받을 수 없게 행동하는 케빈에 대한 비난들로 가득 차 있다. 반면 나는 이끌리듯 케빈에게 감정 이입하였고, 지극히 케빈의 입장과 시선에서 상황을 바라보게 되었던 관람객으로서 조금은 다른 해석을 남기고 싶다. 내 내면의 아직 풀지 못한 어린 시절 결핍의 과제는 나와 케빈사이에 강렬한 동질감을 일으켜 에바와 케빈에 대한 균형 있는 감정이입과 해석을 어렵게 만든다. 나의 역사와 케빈의 역사가 공명하여 생겨난 다양한 감정들을 영화 속 장면들과 함께, 어떤 기억과 생각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는지 세세히 풀어나가 보려고 한다.


아기는 세상에 갓 태어나 누워만 있을 때에도 양육자가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자신을 안고 있는지, 텅 빈 마음을 가지고 달래고 있는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요람에 누워 울다가도 자신을 달래기 위해 다가온 양육자의 그림자를 본능적으로 느낀다.

 에바는 케빈을 뱃속에 품을 때부터 아기의 존재를 부정했기 때문에 태어난 케빈을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안았을 리가 없다. 그런 에바의 공허한 마음은 겉으로 보이지는 않아도 에바 스스로 알아채기도 전에 케빈이 가장 먼저 실감하였을 것이다. 케빈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엄마의 사랑을 온몸으로 갈구하듯이 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런 케빈을 어떻게 다룰지 모르는 에바는 공사장에 가서 아기 울음소리 대신 공사장 드릴 소리에서 평화를 느낀다. 그런 에바의 마음을 읽어내듯 케빈은 공사장 소리보다도 더 큰 데시벨을 내어 운다.


케빈은 말을 배우기 전부터 엄마에게 끊임없는 거절을 당한다. "엄마는 케빈이 태어나기 전에 훨씬 더 행복했어." "네가 없었으면 나는 프랑스에 있었을 거야." 세상에 케빈을 태어나게 만든 당사자가 '너는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라고 끊임없이 말한다. 스스로가 누구도 반기지 못하는 존재임을 언어보다도 먼저 깨우친 것이다.

나는 평범한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남매 중 장녀이다. 물론 케빈만큼은 아니지만 어머니의 시집살이와 맞벌이로 녹초가 된 어머니의 모습과 표정은 끊임없이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지게 만들었다. 어머니에게 고달픈 삶을 선사한 아버지와 시어머니에 대한 분노는 나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함께 목욕할 때, 단둘이 드라이브할 때와 같이 어머니와 단둘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어린아이였던 나에게 참 반가운 시간임과 동시에 벗어날 수 없는 감옥 같은 시간이었다. 전문가인 심리치료사가 나에게 해주는 역할을 나는 고작 아동기에 어머니께 최선을 다해해 주었다. 때로는 전치의 대상이 되어 분노의 언어가 필터 없이 내 귓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자꾸만 흔들리는 나날이었다. 어머니의 사랑과 관심을 받기 위해서는 어머니의 투사와 전치를 견뎌야 했다. 온전한 아이로서 사랑받는 경험이 너무나 간절했지만 가질 수 없었기에 희망조차 품을 수 없었으며, 너무나 외롭고 고달팠던 어린아이가 케빈이라는 또 다른 자신과 같은 거울 같은 친구에게 반가움을 느끼는 것이다.


케빈은 자신에게 꽉 찬 사랑의 마음을 줄 수 없는 엄마의 관심을 끌기 위해 끊임없이 신호를 보낸다. 그 신호는 엄마의 요청에 대답하지 않기, 엄마와 아빠가 대화하고 있는 도중에 소음 만들기, 엄마가 꾸며놓은 여행지도방을 물감으로 망쳐놓기 등으로 상대방이 받아줄 수 없는 행위로 표현된다. 이러한 행위들을 보고 사람들은 "케빈 같은 아이를 키우는 에바가 불쌍하다." "저렇게 말썽을 부리니 사랑을 못 받지."라고들 말한다. 이 부분에서 표면적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매우 중요한 사실은 케빈에게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된다고 훈육해줄 대상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훈육은 사랑에 기반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케빈은 훈육의 기반마저 박탈당한 아동이다. 케빈은 그저 엄마의 사랑과 관심을 받기 위해 본인이 아는 유일한 형태로 본인의 의도를 표현했을 뿐이다. 아이가 다양한 형태로 자신의 욕구를 건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어른에게서 배우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케빈은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는 사실을 보아주어야만 한다.


 나는 케빈과 달리 말을 잘 듣고 의젓하게 생활하고, 말하지 않은 일도 미리 파악하여 해놓는 아이가 되기를 선택하였다. 내가 살아온 환경에서는 말썽 부리는 것보다 의젓해져서 울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관심을 받기에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울고 싶어도 울지 않는 것, 어른들이 한번 해준 말을 절대 잊지 않고 강박적으로 이행하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 같으면 미리 판단하고 요구조차 하지 않는 것. 이것이 내가 선택한 길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케빈과 완전히 상반된 형태이다. 하지만 그 안에 품고 있는 마음은 너무나도 일치하여 말썽 부리는 케빈을 보면 어릴 적 내가 떠오른다. 그저 양육자의 눈길 한번, 손길 한번 더 느끼기 위한 처절한 발버둥임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행동은 성인이 어떤 행동을 할 때 수많은 측면을 고려하는 것처럼 복잡하지 않다.

나는 적대감이 가득한 케빈도, 단 한 번도 마음속에서 엄마를 향한 마음을 거둬들인 적 없으리라 확신한다. 영화에서도 그런 케빈의 모습을 잠깐씩 보여준다. 에바가 배변 가리기가 안 되는 케빈에게 괘씸함을 느끼고 케빈을 던져 케빈의 팔이 부러지던 날, 케빈은 아빠에게 자신이 실수로 책상에서 떨어져서 다쳤다고 거짓말을 한다. 엄마의 실수를 7살짜리 어린아이가 짊어지기를 선택한 것이다. 케빈은 에바가 죄책감을 느끼고 있으며 이 사실이 아빠에게 알려지면 에바가 부정적인 평가를 받게 된다는 것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물론 그 의도 속에는 엄마의 죄책감은 홀로 소유하여 엄마의 약점을 쥐고 본인에게 관심을 쏠리게 만들려는 소유욕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케빈은 에바의 본성에 대한 비밀을 흉터와 함께 오직 자신의 것으로 간직하기를 원한 것이다.

 또 다른 장면에서는 에바와 실리아(케빈 여동생)가 길을 걷고 있던 중, 맞은편 서점 앞에서 에바의 사진과 전시된 책을 응시하고 있는 케빈이 있다. 에바를 상징하는 색인 빨간색 외투를 입은 채. 그런 케빈을 본 에바는 집에 가서 케빈에게 오늘 서점에 갔었냐고 묻는데 케빈은 가지 않았다고 대답한다. 케빈은 아무도 모르는 틈을 타 엄마만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자신이 엄마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세상에 내비칠 수 없다. 그 마음은 너무나 취약하고 원초적이며, 스스로가 품고 있는 결핍의 골짜기는 본인이 알아채기가 어려울 정도로 깊어져 있다. 용기 내어 꺼내었을 때 거부당하는 아픔을 또 겪는다면 이전의 아픔의 몇 배의 고통이 되돌아온다는 것과 자신의 분노가 감당하기 힘든 크기로 커질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이에 덧붙여 엄마의 사랑을 너무나도 원하여 그 마음을 표현했을 때, 사랑이 돌아올지 분노와 경멸이 돌아올지 예상조차 불가능하다. 에바의 태도에는 일관성이 너무나 부족하기에 예상과 기대는 케빈에게 사치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품었던 마음은 어떤 형태로든 밖으로 나와 세상 빛을 보지 못하면, 그 안에서 커지면 커졌지 작아지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안에서 떠돌다가 길을 잃은 마음은 다른 갈등과 상처와 엉켜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잃은 채 가라앉고 고이기 시작하여 부패하여 원래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된다. 사랑에 대한 갈망과 희망에서 시작된 이 마음은 좌절감과 분노로, 더 나아가서는 적대감으로 형태가 변하고 그 마음은 아이의 표정과 행동, 생각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청소년기의 나는 어릴 적 결핍으로 애정 갈구의 마음은 여전히 숨기고 있지만,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에 케빈처럼 항상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와 학원에서는 또래와 어울리기 위해 또 다른 자아를 만들어 전전긍긍하며 줄타듯한 아슬아슬함을 견디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아이였다. 마음속에서는 이미 부모에 대한 기대와 마음을 없애버렸기 때문에 부모가 나에게 무언가를 해주려 해도 무엇이든지 비꼬아 받아들이게 되었다. 내가 이렇게 될 때까지 무엇하다가 이제 와서 아무것도 없는 모래밭에 무엇이든 쌓아보려 노력하는 그들에게 분노가 치솟은 것이다. 케빈이 에바와의 저녁식사에서 하는 대사를 듣는 내내 나의 입가에는 케빈에게 빙의한 듯 오래도록 잔잔한 조소가 띠워지곤 했다.

내가 부모를 바라보던 눈빛을 케빈의 눈빛에서 발견한다. 턱을 당긴 채 위로 치켜뜬 날카로운 눈빛, 힘이 잔뜩 들어가 마주치는 사람은 내 눈을 피하기를 바라는 듯한 눈빛. 그 적대감을 풀어줄 대상을 간절히도 바라지만 그 속내를 간파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음을 직감하며 매일매일을 좌절감 속에 살아가는 것이다.

케빈은 결핍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게 가난하게 자라지 않았다. 유명한 여행작가인 에바를 엄마로 두었고 이층짜리 거대한 저택에서 자란 중산층 이상의 자녀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이는 애착 손상과 사랑받지 못한 결핍의 마음은 경제적 풍족 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별개의 것임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나 또한 그저 평범한 직장의 회사원이신 두 분의 부모님을 두었으며 어릴 적에는 종종 가족여행도 가며, 쉬는 날이면 공원에 잔디밭에서 캐치볼을 하며 놀기도 하였다. 여느 가족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지극히 일반적이고 안정적 이어 보이는 가족이었다. 그런 환상적인 허울은 감정의 수용의 필요를 무가치하게 내버려 둘 수 있게 정당화하고, 외롭게 비어 가는 아이의 마음이 보이지 않게 만들며 그 아이조차 스스로를 속이며 살아가도록 한다.

그런 케빈에게 에바의 진실함과 따스함을 느끼는 유일한 장면과 중요한 소재가 등장한다. 바로 "로빈훗"이다. 케빈이 지독한 몸살에 걸려 집 마룻바닥에 쓰러져 있던 날, 에바는 따스한 목소리와 손길로 정성을 다해 케빈을 보살피고 침대에 누워있는 케빈에게 동화책 <로빈훗>을 읽어준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잃고 가장 취약해져 있을 때 손길을 내밀어주는 것은 한 사람에게 정말 소중하고 잊을 수 없는 경험을 남기곤 한다. 아마 이날은 케빈에게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하고 생생한 기억으로 남았을 것이다. 이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그 이후 케빈이 끊임없이 로빈훗 복장을 하고 뒤뜰에서 화살 쏘기 연습에 전념하는 것이다. 에바는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 중의 하나를 읽어준 것일지 몰라도, 케빈은 자신이 가장 약해져 있던 날 가장 갖고 싶었던 엄마의 애정을 '에바의 목소리로 들은 로빈훗 이야기'로 기억하는 것이다. 훗날 이 날의 기억은 로빈훗에 빙의된 케빈이 사람들을 죽이고 세상 모든 사람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만드는 촉매제 역할을 하게 된다.


결국 케빈은 자신의 세상에 에바만 남겨두었다. 학교에서 불특정 다수를 체육관에 가둬둔 채 화살을 쏘아 상해를 가하고 심지어는 가족인 아버지, 여동생 모두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케빈은 15살이 되기 전에도 오래도록 본인의 삶에서 원하는 유일한 대상인 엄마를 제외하고 모두 없애버리고자 계획했을지도 모른다. 나 또한 내 삶 속의 최초의 애착 대상이자 한평생 애정을 갈구했던 대상인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대상이며 의미 있지 않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과거가 있기에 케빈의 살인행위는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가져다준다. 다행히도 나는 가족 밖의 의미 있는 대상과 애착을 형성하고 케빈보다는 많은 수용되었던 경험을 통해 반사회성을 극대화하지 않고 한 명의 평범한 어른으로 성장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한 것 같다. 나는 케빈의 살인행위가 세상에서 수용받지 못한 케빈의 분노의 최초 표출이자 사랑받고 싶은 유일한 대상인 어머니를 갖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다고 생각한다. 케빈의 살인행위에 대한 정당화를 의도한 해석이 아닌, 케빈이 왜 그런 계획을 세우는 상태가 되었겠느냐를 들여다보자는 것이다.  

실행으로 옮긴 최후의 수단은 이전의 어떤 방식보다도 가장 효과적이다. 수감된 케빈을 에바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주 빠짐없이 면회를 간다. 에바의 삶에 유일하게 남은 케빈. 케빈의 삶에 유일하게 남은 에바. 에바의 2년간의 규칙적인 면회는 대장장이가 만든 강철만큼 딱딱하게 굳어서 누구도 허물 수 없었던 케빈의 마음에 균열을 일으킨다. 그 균열은 영화의 마지막 대화에서 분명하게 보인다. 에바가 "이제는 말해주겠니, 왜 그랬니?"라고 물었을 때, 케빈은 "내가 왜 그랬는지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모르겠어."라고 대답한다. 그 이후 에바가 케빈을 안아주기 전 케빈의 눈빛은 그 어린아이 시절부터 한 번도 흔들린 적 없이 분노와 적대감으로 가득 찼던 그의 눈망울이 미세하게 흔들린다. 케빈은 에바가 포옹을 하자 목석처럼 경직되어 어쩔 줄을 몰라한다. 균열이 일어난 케빈의 마음에 미세한 빛줄기가 들어설 수 있는 기회이길 간절히 바라게 되는 장면이다.

<케빈에 대하여>는 수천번의 정서적 외상을 견딘 아이가 발달단계에 멈춰 애착 대상에게 집착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단 한 번이라도 케빈의 산산조각 난 내면을 이해한다면 그를 고작 몇 글자의 단어로 단정 지을 수 없을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 단 한 번도 제대로 환영받아보지 못한 케빈에게서 어린 시절의 나를 발견하고, 더 나아가 지독히도 외로웠던 나에게 동질감과 카타르시스를 선사한 그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나에게 <케빈에 대하여>는 세상에 나와 보듬어져 본 적 없는 작고 취약한 아이가 온몸이 부서져라 1시간 52분 동안 울부짖는 영화이다. 그 울부짖음은 내 안의 어린아이의 울음소리와 만나 공명을 이루었고 그 공명은 나에게 독특한 형태로 다가온 잔잔한 위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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