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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과 잡초

by 글벗

여행길에서 종종 느끼는 건, 목적지보다 가는 길이 아름다울 때가 많다는 거다. 캘리포니아 대로변에 볼거리라고 부를 만한 풍경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없는 쪽에 가깝다. 산보다는 언덕에 가까운 민둥산이 저 멀리 보이고 길과 산 사이에는 지겨운 들판이 있고 드문드문 보이는 나무들은 가뭄에 고생 꽤나 한 모습을 하고 있다. 비를 흠뻑 맞고 자란 한국 땅의 수목이 내뿜는 생명력과는 비교할 수 없다. 요약하면 지루하고 메마른 풍경.


그런 지겨운 도로 풍경이 나에게는 왜 그렇게 아름답게 보일까?

그림을 그리기 전에는 아름답다는 인식에서 그쳤고,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열심히 눈에 담았다. 그림을 시작했을 때에는 마음에 드는 곳을 지날 때 사진을 찍어서 집에 가서 그려보고 싶었다. 그런데 사진에 담긴 도로변 모습은 그리고 싶은 만큼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뭐지? 얼마 전부터는 그 질문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내 눈을 호강시킨다고 느낀 정체는 무엇이며, 그것은 왜 카메라에만 들어오면 아무것도 아닌 장면으로 폭삭 주저앉고 마는 걸까?


지난달 킹스캐년에 다녀오면서 달리는 차 안에서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사진을 찍었다. 이번에는 무작정 그림을 그리면서 알아보기로 했다. 도대체 내가 뭐에 반한 건지 꼭 알고 싶고 그걸 표현하고 싶어서였다.

일단 이 장면을 골랐다. 저 아득히 보이는 지평선과 맞닿은 푸른 하늘과 그 아래 있는 평온한 땅, 그 사이를 잇는 전봇대와 나무, 거기에 끌렸을 것 같았다. 조형미 같은 게 있어서, 그래서 아름다운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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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채화로 스케치를 해보았다. 들판에서 소가 풀 뜯는 모습이 좋았던 것이 기억나 소는 조금 더 크게 그리고 농가도 더 크게 그렸다.

그려놓고 보니까 이야기를 과장하고 싶어졌다. 하늘은 파랗다 못해 보라색이 되려고 했던 것 같고, 나무는 빛을 받아 더 따뜻한 색으로 보였던 것 같았다. 이왕이면 도로변에 핀 들꽃도 더 또렷하게 그려주고 싶었다.


처음 스케치보다는 덜 밋밋했다. 그런데 뭔가 못마땅했다. 들판의 소들과 농가가 보여서 좋았지만 들판의 소와 농가를 보고 카메라를 열고 싶은 충동을 느낀 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꽃이라고 불리기에도 초라한, 그 잡초 수풀이 좋았던 거다.

사진에는 잘 잡히지 않았던 그 잡초. 사진을 보고 실망했던 이유는 내가 생각했던 주인공이 그 모습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아서였다.

이제 내가 뭐를 그릴지 알았다.

잡초를, 예쁜 꽃이 아닌 잡초로 그리는 거다.

작년 겨울에 비가 오지 않았으면 꽃도 못 피우고 벌써 말라버렸을 잡초들이 올봄에는 노랗게 꽃을 피웠고 여름까지 마지막 꽃을 안타깝게 피우고 있는 모습을 그리는 거다.

한 송이씩 정성껏 피워내는 화초가 아니고, 화병에 근사하게 꽂은 꽃다발이 아닌, 척박한 땅에서 억척스럽게 솟아올라 무질서하게 바람에 흔들리며 척박한 땅을 감싸주는 잡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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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를 그리려면 무질서를 그려야 했다. 랜덤이란 것. 나와 아들이 묘하게 끌렸던 주제이기도 하다. 신은 질서의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세상을 보면 분명히 랜덤이어서.

언젠가 아들이 말했다.

"엄마, 사람들은 숫자를 세 개 주면, 아무런 의미가 없이 던진 숫자인데도 거기서 어떻게든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어요. 사람은 그래서 살 수 있는 거예요. 모든 일에 의미를 부여할 줄 알아서."

별 걸 다 알았던 내 아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랜덤을 아주 천천히 그렸다. 랜덤이 모여서 마치 질서가 있는 듯 보이는 인간의 삶을 그리듯.


(아래 그림도 올여름에 그린 '길' 그림 가운데 하나이다. 이 그림은 스케치 없이 곧바로 수채화 물감으로 채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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