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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벗 Jun 29. 2020

진작 읽었다면 희망이 있었을지도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를 읽고

이 책은 미처 생각 못했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2016)>의 저자는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기 사건 범인 중 한 명인 딜런의 엄마이다. 몇 해 전 책 소개를 접했을 때는 가해자의 엄마가 어떤 변명을 할지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내 아이는 늘 당하는 입장이라고 생각했기도 하고 나와는 동 떨어진 이야기 같기도 했다. 또 그런 일을 겪고도 아직 살아서 책까지 낸 걸 보면 엄청 뻔뻔한 사람이라고 생각되어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책이 출간된 지 4년 후이 지났다. 지난주에 인터넷을 기웃거리다가 이 책이 우연히 내 눈에 들어왔을 때 깨달았다. 내가 바로 이 엄마라는 걸. 내 아이는 자기 자신을 해친 가해자이므로 나도 가해자의 엄마이며, 나도 누군가의 눈에는 아들을 잃고 살아서 글을 쓰는 뻔뻔한 사람으로 보이겠구나. 동병상련의 무겁고 반가운 마음으로 책을 주문하여 읽었다.


제목에는 '가해자'라는 단어가 있지만 원제는 <A Mother's Reckoning>이다. 'reckoning'에 합치되는 우리말이 없어 대략 <한 어머니의 회상>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즉 사건이 벌어지고 지난 15년 동안 사건을 이해하려고 몸부림친 노력을 정리한 글이다. 사건은 언론에 수도 없이 보도되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엄마가 경험한 것은 전혀 다른 사건이었다.


1999년 4월 20일 화요일. 딜런은 곧 콜럼바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할 예정이다. 콜럼바인 고등학교가 있는 리틀턴 시는 중산층 주택이 늘어선 평화로운 동네이다. 딜런의 아버지 톰은 지구물리학자이며 어머니 수(저자)는 대학에서 가르치거나 상담 업무를 했으며, 당시에는 인근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장애아 관련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며칠 전에는 딜런이 합격한 애리조나 대학에 방문하여 기숙사를 둘러보고 왔으며 고등학교 졸업파티에도 다녀왔다. 딜런은 화요일 0교시에 볼링 수업이 있다. 보통은 소리를 질러 깨워야 학교 갈 준비를 하는데, 이 날은 수보다 먼저 일어나서 벌써 집을 나서고 있었다. "딜런!" 이른 새벽 컴컴한 현관을 나서는 아들을 불러본다. 딜런은 돌아보지도 않고 짤막하게 "굿바이"하고 집을 나선다. 몇 시간 후, 직장에서 일하던 수는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총격 사건이 벌어졌다는 전화를 받는다. 놀라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아들이 무사하기를 빌면서 집으로 돌아온다. 또 몇 시간 뒤, 수는 교우를 무참히 대량 살상한 살인자가 자신의 아들임을 알게 된다. 이 사건으로 학생 13명과 교사 1명이 죽고, 25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미국은 물론 전 세계를 충격에 빠지게 하였으며, 미국 총기 소지, 잔인한 비디오 게임, 부모의 무관심 등 여러 가지 사회 문제가 그 원인으로 연일 보도되었으며, 조승희가 저지른 버지니아텍 사건과 함께 가장 끔찍한 총기 살상 사건으로 꼽힌다.


저자는 지식과 신념에 따라 아이를 반듯하게 키우고자 노력하는 평범한 중산층 엄마에서 총기 사건 가해자의 엄마로 정체성이 하루아침에 뒤바뀐다. 처음에는 모두 다른 한 명의 가해자인 에릭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딜런의 부모는 총기 소지와 인종차별에 철저히 반대하였으며 두 아이와 늘 친밀한 관계였으며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하는지 놓친 적이 없었다. 딜런은 폭력적인 비디오 게임에 빠진 적도 없었으며 절친한 친구들이 있었다. 사소한 사건이 몇 번 있었지만 모두들 사춘기 성장 과정에서 겪는 자연스러운 문제라고 말해주었고 본인도 그렇게 생각했다. 따라서 에릭이 순진한 딜런을 꼬셔서 저지른 사건이라고 밖에는 이 일을 달리 이해할 수 없었다. 사건 몇 년 후, 사건 현장을 녹화한 폐쇄회로 비디오를 보게 된다. 총을 들고, 분노에 찬 인종차별적 욕설을 마구 퍼부으며 교우들에게 총을 난사하는 사람은 자기 아들의 모습을 했지만 자기 아들이라고 알아볼 수 없었다. 저자가 벌어진 일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아들이 남긴 일기, 작문, 메모를 모두 찾아보고, 딜런이 죽기 전 몇 년 동안 얼마나 외롭고, 우울하고, 절망적이었는지 알게 되고, 여기에 바른 해석을 도와줄 전문가들을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사건이 자기 아들에게는 동반 자살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에릭은 다른 사람을 죽이는 과정에서 자신이 죽는 것을 괘념치 않은 반면, 딜런은 자신이 죽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이 죽는 것을 괘념치 않았다."


내 아들의 가해자는 자기 자신 뿐이었으니까 저자가 겪은 불행은 내가 겪은 일과 규모와 피해면에서는 다르지만 내가 저자의 엄마에게 공감하기는 충분했다. 아들이 그런 결정을 내릴 때까지 모르고 있었으며, 사건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위해 몸부림친다는 공통점도 있었지만 딜런과 내 아들도 비슷한 점이 많았다. 단, 특징을 열거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저자도 여러 번 강조하는 것처럼 자살과 정신 문제(저자는 정신이라는 모호한 영역에서 문제를 관찰 가능한 영역에서 다루는 측면에서 두뇌 문제라는 용어를 선호한다)는 깊이 관련되어 있지만 우울증이나 정신 질환을 겪는 사람들이 모두 자살하거나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이러한 일반화가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하여 전문적 도움을 당당히 요청하기 어렵게 만들므로 주의해야 한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일례로, 딜런과 내 어들의 가장 자명한 공통점은 고등학교 졸업반이었다는 점인데 대학 진학을 앞둔 시점이 인생에서 대단히 어려운 시기이지만 그렇다고 모두 자살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다음의 공통적 특질이 그대로 자기 파괴의 성향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다시 강조하며 조심스럽게 적어본다.


두 아이 모두 실패를 몹시 두려워하고 비난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들의 경우 스포츠처럼 승부가 있는 것은 모두 피했고 어려워 보이는 것은 아예 시도하지 않으려고 했다. 저자가 사건 후 권위 있는 자살 전문 심리학자들을 만나서 딜런이 쓴 작문 등을 바탕으로 추측해 본 결과 딜런은 회피성 성격 장애를 겪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회피성 성격 장애는 비판에 대한 예민성 이외에 거부에 대한 두려움이 큰 특징이다. 두 아이는 종이접기를 좋아했다는 공통점도 있었다. 종이 접기처럼 건전하고 널리 사랑받는 활동 자체에 문제가 있을 리는 없다. 피카추를 좋아했다는 것만큼이나 아무런 의미 있는 우연의 일치일 가능성이 크다. 이외에도 급우들보다 생일이 일렀다는 점, 부모에게 늘 고분고분한 아이였다는 점, 성향이 다른 형제가 있었고 상대적으로 기르기 쉬운 아이였다는 점 등도 비슷했다. 또 두 아이 모두 자녀교육을 중시하는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서 이러한 문제가 오히려 잘 보이지 않았을 여지가 컸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어느 것도 경종을 울릴 만한 문제는 아니었으며, 단지 같은 아픔을 겪은 사람으로 더 공감할 수 있는 요소로 정도로만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은 여러 가지로 칭찬할 점이 많다. 작가는 사실이나 감정을 두리뭉실 에둘러 기술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 눈에 거슬릴 수 있는 저자의 감정까지 솔직히 기록했다. 저자는 초기 며칠간 딜런이 죽인 무고한 생명을 위해 슬퍼하지 못했다고 했다. 물론 어느 시점 이후 희생자들과 그들의 가족이 겪는 아픔까지 함께 안고 살고 있지만. 사건 초기 희생자에 대한 무감각함 이 외에도 책 곳곳에 독자의 시선보다는 본인에게 정직하려고 노력한 부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자신이 잘했다고 생각한 것에 대한 후회와 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는 그대로 만질 수 없는 아픈 상처이다. 하지만 뼈아픈 상처는 뼈아픈 진실만이 치유할 수 있으므로 저자는 완치가 없는 길고 긴 치유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다모클레스의 칼이 생각난다. 권력자들의 권좌에는 무시무시한 칼 한 자루가 가느다라 말총에 매달려 벽에 걸려있다. 언제 모든 것을 빼앗길지 모르는 불안한 자리. 부모라는 자리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내가 열심히 한다고 불행이 피해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4년 전에는 몰랐다. 오히려 내가 노력하는 부모이니까 내 아이는 잘 될 거라는 거짓된 안정감에 눈이 멀어 우리 가정 위에 매달려 있는 다모클레스의 칼을 보지 못했다. 그때 이 이야기를 껴안을 만큼 성숙했더라면, 이 이야기를 타산지석으로 삼았더라면 나는 아들의 결정을 어쩌면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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