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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벗 Jul 15. 2020

외할머니가 해주신 짧은 이야기들

우리 할머니는 이야기꾼이었다. 할머니에게는 항상 이야기가 가득했다. 불만이 많은 사람이 입만 열면 불만이 튀어나오듯, 할머니의 마음에는 이야기가 가득하여 할머니의 말은 모두 이야기였다.


"옛날에 어떤 중매쟁이가 신붓감 자랑을 하더란다. 그 색시는 정리정돈을 어찌나 잘하는지 물건 찾느라 허둥대는 법이 없다고. 얘, 바느질해라. 그러면 반짇고리를 턱 가지고 와서 곧장 바느질을 시작하고, 얘야, 밥상 좀 차려라. 그러면 숟가락 젓가락 대번에 찾아서 척 밥상을 차린다고.  며느리 들이려는 시어머님 감이 옳다구나 하고 그 색시를 며느리 삼겠다고 했지. 그런데 색시가 왔는데 소경이더란다. 눈 뜬 사람은 다 아무 데나 두고 물건 찾느라 시간도 허비하고 그러는 거지 어떻게 매번 제자리에 두겠어?"


"볕 좋고 바람 솔솔 부는 날, 어떤 사람이 도시락을 싸서 놀러 나갔더란다. 도시락을 맛있게 준비했으니 정자 좋고, 경치 좋고, 물 좋은 곳에서 도시락을 먹으리라. 그런데 암만 가도 그런 데가 없지 뭐냐. 경치가 좋으면 정자가 허름하고, 정자가 좋으면 물이 없고. 결국 기껏 싸간 도시락도 못 먹고 배만 쫄쫄 굶고 돌아왔단다. 나중에 신랑감 고를 때 너무 재지 말란 소리야. 세상에 별사람 없다."

"할머니는! 난 결혼 안 한다니까."

"지금 결혼하라는 얘기는 아니고.."


할머니는 구전 이야기를 전래 동화집보다 더 구수하게 들려주셨다. 나는 밤마다 할머니 이야기를 들으며 잠이 들었고, 할머니가 성경을 읽는 소리에 잠이 깨기도 했다. 할머니는 소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한글만 겨우 뗀 분이었는데 할머니 성경에는 한자가 섞여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모르는 한자가 많았을 것 같은데 할머니는 용케 성경을 모험 이야기를 읽듯 신나게 읽으셨다.

"자, 이제 야곱이 제 아버지한테 거짓말하는 대목이다. 이 욕심 많은 둘째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러면서 판소리 읊듯 읽어 내려가셨다.


어릴 때 우리 집에는 전래동화 명작동화 전집에 심청전과 인어공주가 없었다. 어린애가 부모 때문에 자살하는 이야기인 심청전과 남자 때문에 자살하는 이야기인 인어공주를 아빠가 치워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심청전을 들은 것도 할머니의 구수한 이야기를 통해서였다. 심청이 이야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이야기, 전우치 이야기를 들을 때는 어찌나 생생한지 분명히 할머니가 아는 사람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손톱을 아무 데나 깎아 놓았을 때는 손톱 먹고 사람이 된 구미호 이야기를 해주었고, 문지방에 올라서서 까딱댈 때는 문지방에 사는 지신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많은 이야기가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가 이제는 할머니에 대한 기억마저 가물가물하다. 아들 유해를 할머니 곁에 묻었는데 책 좋아했던 나의 아들과 이야기를 좋아했던 나의 할머니는 매일 재미있는 이야기 하느라 심심하지는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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