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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벗 Jul 25. 2020

1980년 잡종견 모녀 실종 사건 (I)

사건의 배경

여덟 살 때였다. 그때 우리 가족이 살던 곳을 나는 버스정류장 이름으로 알고 있었다.

'남양주유소 앞"

망우대로가 경춘가도로 바뀌는 망우리 고개에서 경기도 경계로 넘어서자마자 나오는 정거장 이름이다. 아빠가 직장을 구하고 처음으로 집을 장만한 동네였다. 교문리 시내도 아니고 서울도 아닌 이 마을은 그린벨트에 묶여 있어서 내가 여섯 살부터 10살 때까지 사는 동안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가 사는 골목은 남양주유소 맞은편이었다. 서울 방향 버스가 서는 이쪽 정류장 앞에는 빵, 사탕, 신문 등을 파는 잡화점이 있고, 잡화점 옆으로 난 행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면 왼쪽으로 넓은 향나무 밭이 나온다. 향나무 밭을 지나 왼쪽으로 모퉁이를 돌면 망우리고개 뒤통수로 이어지는 언덕길이다. 언덕길 양쪽으로는 크고 작은 집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바람이 불면 비석 공장에서 돌가루가 날려서 길을 뿌옇게 만드는 맞은편 동네와 비교하면 산기슭 언덕길에 있는 우리 동네는 전원적이라고 우길 만했다. 언덕 아래 행길 부근에서 꼭대기 산기슭 끝까지 각기 다른 모양과 크기의 집들이 별다른 규칙 없이 섞여 늘어서 있었다. 부정적으로 보면 난개발이고, 긍정적으로 보면 소셜 믹스인 셈이다.


마을 사람들은 각 집을 별명으로 불렀다. 골목 초입 오른쪽에 있는 큰 집은 마당 넓은 집이었다. 이 집에는 내 나이 또래 아이들이 없어서 왕래가 많지는 않았고, 이 집 아주머니가 우리 할머니 연배여서 할머니 따라서 가끔 놀러 갔을 뿐이다. 나는 그 집에 볼일이 없었으므로 마당에 펴놓은 평상에 걸터앉아서 주는 간식을 받아먹으면서 마당에 묶어놓은 백구만 쳐다봤다.


마당 넓은 집 맞은편에는 우리 동네 유일한 2층 집이 있었다. 그 집에는 나와 동갑인 D군과 그 아이의 부모가 살았다. D군 가족은 그 동네에서 가장 부자였다. D군은 무슨 사립학교에 다니고 공부를 열심히 하느라 동네에 나와 노는 일이 거의 없었다. D군의 인기척은 D군이 피아노 연습하는 소리가 창문 너머로 흘러나올 때, 그리고 가끔 자가용으로 등하교하는 모습을 목격할 때가 전부였다. 동네 사람들은 D군의 모친의 전력을 수군대었고, 어쩌다 눈치 없는 사람이 잘못 걸리면 D군 모친에게 머리채를 잡히곤 했다.


오르막 길 제일 끝에는 내 이름과 똑같은 아이가 살았다. 그 집에는 대학교에 다니는 큰 오빠부터 아직 학교에 안 다니는 막내까지 아이가 여러 명 있었다. 안주인은 경상도 댁이었는데 사우디에 일하러 간 남편 대신 많은 아이들을 혼자 건사하느라 목청이 매우 우렁찼다. 인심 넉넉하고 보면 늘 기분 좋아지는 사람들이었다고 기억한다.


그 사이에 여러 집이 있었다. 검둥개를 기르던 검둥이네, 장롱 공장을 하는 장롱 공장집, 마을에서 연세가 가장 많은 할머니가 사는 할먼네, 그리고 별명이 안 붙은 작은 집들... 그중 하나가 우리 집이었다. 우리 집 대문은 늘 열려 있었고 하루에도 여러 사람이 우리 집에 들렀다. 가끔 동네 식모들이 집주인에게 맞거나 구박을 받고 우리 집에 와서 하소연하고 흐느끼면 할머니가 같이 흥분하고 맞장구 쳐주던 장면이 선명하다.


우리 집에는 세 명의 어른과 여자 아이 네 명, 암캐 한 마리와 강아지 세 마리, 닭 한 마리, 토끼 두 마리가 살았다. 닭 한 마리와 토끼 두 마리가 살았던 시점은 겹치지 않는다. 토끼가 먼저인지 닭이 먼저인지는 모르겠다. 여자 아이도 이사 올 때는 두 명이었는데 그 집에 사는 동안 두 명이 더 늘어 네 명이 된 것이다. 대문에 들어서면 왼쪽에는 개 가족이 살 수 있는 개집이 있고 그 옆에 화단과 토끼와 닭이 사는 사육장이 있었다. 오른쪽에는 장독대와 광이 있었다. 손바닥만 한 바깥 마당 안쪽에는 봉당이라고 부르는 안마당이 있었다. 안마당을 둘러싸고 가운데 부엌을 중심으로 왼쪽에 안채, 오른쪽에 사랑채가 있었는데 사랑채에는 남주네가 살았다. 아저씨가 생선 장수여서 가끔 팔다 남은 생선을 우리에게도 주었다. 우리 집에 사는 동안 남주 동생이 태어났다. 남주 어머니는 한참 수다 떨다가도 아기가 배고파 칭얼거리면 풍만한 젖을 아기에게 척 물렸다.


우리 개 이름은 미나였다. 내가 지어준 이름이다. 목사님 댁에 놀러 갔다가 마당에서 노는 강아지가 너무 예뻐서 데려가겠다고 졸랐다. 이제 젖을 떼었다면서 데려가도 된다고 했으니까 한 4개월 때쯤 데려온 것 같다. 미나는 하얀색에 까만 무늬가 있는 바둑이였다. 동네 사람들은 개한테 사람 이름을 지어주었다면서 흉을 봤지만 나는 우리 개가 정말 미나처럼 생겼다고 생각했다. 똥개라도 아주 예쁘고 똑똑하고 착해서 미나라고 불릴 자격이 있었다.


개들에게 집에서 허용된 공간은 바깥마당까지였다. 물론 개들은 늘 음식 냄새가 솔솔 풍기는 부엌에 쳐들어 오려고 호시탐탐 노렸지만 할머니는 플라스틱 쓰레빠로 봉당 바닥을 탁 쳐서 개들을 쫓곤 하셨다. 미나는 아침 먹고 나서 하루 종일 동네와 집을 수시로 들락날락거렸다. 미나가 낳은 새끼 세 마리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 동네 어디에선가 잉태된 아이들이다.


(계속)



표지 사진: Aleks Magnusson (https://www.pexels.com/photo/empty-road-with-fog-3071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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