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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벗 Jul 27. 2020

1980년 잡종견 모녀 실종 사건 (II)

[경고] 결말이 몹시 비극적입니다

강아지들이 태어나던 날, 집안은 셀렘과 긴장으로 들썩였다. 할머니는 개집에 이불을 덮어서 입구를 가리고 우리가 개집 주위에 얼씬대지 못하게 했다. 출산이 임박한 개는 극도로 예민해져서 이렇게 해주어야 안심하고 출산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궁금한 걸 못 참고 어른들 몰래 개집 안을 들여다보았다. 컴컴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개집 안에는 어미개 옆에 뭔가 허연 게 들어 있었다. 막 달려가서 드디어 강아지가 태어났다고 알렸다가 더 기다려야 된다고 꾸중만 들었다.


다음 날 아침, 구수한 북엇국 냄새가 진동을 했다. 할머니가 얼굴에 함박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미나가 밤새 새끼를 낳았으니 얼마나 신통하니? 오늘 아침은 미나가 먼저 먹는 거야."

당시 우리 동네에는 개 사료가 따로 없어서 보통은 우리가 먹고 남은 잔반을 다시 끓여서 먹였는데 이날은 미나가 주인공이라고 미나에게 국을 먼저 떠서 주었다. 백구나 검둥이 같은 우리 동네 다른 개들이 비하면 강아지만큼 조그만  미나가 새끼를 낳다니. 내가 생각해도 미나가 참 장한 것 같아서 괜히 나까지 우쭐해졌다.


미나가 낳은 강아지는 네 마리였다. 한 마리는 살지 못했고, 한 마리는 앞다리 아래가 없는 불구로 태어났고, 두 마리는 건강했다. 새끼를 낳은 후에도 한 동안은 개집 주위를 조심조심 지나다녀야 했다. 미나도 예전처럼 꼬리 치며 달려 나오지 않았다. 여전히 입구를 반쯤 가린 이불 밑으로 섬뜩한 경계의 눈빛을 보여서 다가가서 쓰다듬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만져보지 않고도 물컹물컹하다는 걸 알 수 있는 생명체들을 자기 새끼라고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지키는 미나를 보니 낯설고 야릇했다.


강아지들과 놀 수 있다고 허락받은 것은 강아지 털이 보송보송 나고 여기저기 기어 다닐 만큼 자랐을 때였다. 엄마는 개벼룩 옮으면 큰일 난다고 개들을 집안에 못 들어오게 했지만 갓 태어난 강아지들이 무지무지 귀여워서 방으로 데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 강아지들을 방으로 데려가서 놀다가 엄마가 오면 얼른 개집에 돌려놓곤 했다. 할머니가 늘 하시던 말씀이 있다.

"세상에 갓난 애처럼 못 생긴 게 없단다. 갓난 애는 지 에미 눈에나 이쁘지. 강아지 봐라. 을매나 이쁘냐. 누가 봐도 이쁘지."

강아지들은 그렇게 예뻤다.


강아지들은 무럭무럭 자랐다. 불구로 태어난 강아지도 절름거리면서 다른 강아지들과 함께 어디든 같이 돌아다녔다. 무릎 아랫부분이 없어서 고뱅이를 발처럼 딛고 다니다 보니 그 부분 살갗이 빨갛게 벗겨져서 너무 아플 것 같았지만 막상 강아지는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다른 개들도 절름발이라고 따돌리지 않고 네 마리가 함께 우르르 몰려다녔다. 가끔 약수터가 있는 산에 갈 때 강아지 가족을 데려갔다. 놀다가 어둑어둑 해질 무렵 산에서 내려갈 때 "미나야~" 크게 부르면 미나는 강아지를 모두 데리고 쏜살같이 뛰어 내려왔다. 평소 동네에서 놀 때는 부르러 가지 않아도 저녁 시간 맞춰서 돌아왔다.


강아지들이 강아지 태를 벗고 얼추 어미 개만큼 자랐을 무렵, 남주네가 이사를 나간 날이었다. 저녁 먹을 때가 되었는데 절름발이 강아지와 수컷 강아지 한 마리만 시무룩하게 밥을 먹으러 오고 미나와 제일 예쁜 암컷 강아지 한 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온 가족이 나서서 개 이름을 외치며 돌아다녔지만 개 모녀는 그날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 엄마와 할머니가 동네를 수소문하고 다닌 끝에 제보 하나를 받았다.

"어제 이삿짐 용달 나갈 때 남주 아버지가 그 집 강아지를 안고 가던데요. 난 그 집에 개가 많으니까 한 마리 주나보다 했지."

그때는 핸드폰은 고사하고 전화도 없는 집이 많았고 남주네도 전화가 없었다. 엄마는 남주네가 이사 간 집을 어찌어찌 수소문하여 찾아갔다. 우리는 엄마가 개들을 찾아올 거라고 철썩같이 믿었다. 남주 아버지는 우리에게 생선도 가끔 주는 착한 사람이니까 우리 개들이 너무 예뻐서 데려갔을 거야. 그래도 그렇지. 허락도 안 받고 데려가면 어떻게 해!


그날 오후 엄마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곧이어 할머니가 노발대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어.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것들이 사람이야?"

강아지 모녀에게 일어난 일은 우리의 예상을 뒤엎는 끔찍한 일이었다. 엄마가 갔을 때 우리 개 두 마리는 이미 음식이 되어 사라진 뒤였다. 남주 아버지의 변명은 이랬단다.

미나를 훔쳐갈 생각은 없었다. 강아지나 한 마리 집어가야지 했지. 그 집에는 강아지가 많으니까 강아지 한 마리쯤 없어져도 뭐 그냥 잃어버렸나 보다 할 거야.

그래서 강아지 한 마리를 잠바 안에 넣고 집을 나서는데, 자기 새끼를 데리고 가니까 미나가 계속 짖으면서 따라갔던 거다. 지금 같으면 법적 조치를 취할 일이었겠지만 그때는 1980년, 교문리였다. 엄마는 남주 아버지 사과만 받고 울면서 돌아왔다.


여덟 살의 나는, 자기 새끼를 데려간다고 쫓아가면서 짖어대는 어미 개에게 저지른 만행에 대해, 자기를 보고 밤낮으로 꼬리를 흔들며 반가워하던 강아지에게 저지른 만행에 대해 충격을 금치 못했다. 나와 두 살 아래 동생은 저녁도 안 먹고 깜깜해질 때까지 네 시간을 울었다. 그칠 수 없을 것 같았던 울음을 그치게 한 것은 알량한 보름달 빵과 바나나 우유였다. 평소에는 한참을 졸라야 먹을 수 있었던 간식 앞에서, 나와 동생은 눈물을 훔치고 간식을 덥석 받아 먹었다.


남은 강아지 둘을 볼 때마다 나는 잃어버린 개들 생각에 또 눈물이 났다. 그건 어른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어느 날 엄마가 개 두 마리를 다른 동네에 사는 집에 주겠다고 했다.

"우리 개들은 이제 그 집에 가서 아주아주 행복하게 잘 살 거야."

난 순순히 수긍했다. 왜 그랬을까 지금 와서 곰곰이 생각하면, 남은 강아지 두 마리와 이런 슬픈 이별을 다시 겪을지 모른다는 불안을 안고 사느니, 우리 강아지들은 동화책의 해피엔딩처럼 마당이 아주 넓은 집에서 행복하게 영원히 살 거라는 환상을 택하는 쪽이 훨씬 마음 편한 일이었던 것 같다.


개들을 모두 보낸 후에도 빈 개집은 한동안 마당에 서 있었다. 우리는 그 후 몇 년 동안 개를 기르지 못했으며, 이 일은 20년 넘도록 내가 경험한 가장 슬픈 일이었다.


5년 전 지금 기르는 테디를 우리집에 데려올 즈음에는 '개'가 '애완견'을 넘어서 '반려동물'로 불리는 시대가 되었고, 개는 분양이 아니라 입양되는 존재가 되었다. 대부분 개 주인들은 개하고 사이의 관계에서 자신을 '엄마' '아빠'라고 지칭했다. TV 프로그램에서도 개는 그 집의 '아이들'이 되었다. 하지만 테디를 데려올 때 나를 '엄마'로 지칭할 수 없었다. 개의 수명은 사람보다 훨씬 짧으니까 기르던 개를 떠나 보내는 것은 기르는 사람에게 예정된 몫이고, 나는 기르던 개와 이별하는 아픔이 무엇인지 생생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에게 나를 '엄마' 아닌 '아줌마'로 불러준다면 이별의 아픔이 조금은 덜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내가 잃을까봐 무서워하던 테디는 우리집에서 사랑을 듬뿍 받으며 건강하게 살고 있다.






표지 사진: Aleks Magnusson (https://www.pexels.com/photo/empty-road-with-fog-3071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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